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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법의학자의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

죽음에 대한 예의
등록 2019-11-29 02:03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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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꼭 삶의 반대말은 아니라지만, 생명을 잃어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괴롭다. 언젠가는 직면해야 할 죽음이 조금은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30여 년간 2만 구 이상의 주검을 부검한 베테랑 법의학자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무리 험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해도, 가장 높은 단계의 해방과 안식.”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셰퍼드의 말이다. (갈라파고스 펴냄)는 두려움과 비참함, 심지어 혐오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관한 불량하고 “비합리적인 감정”을 쓸어낸다. ‘죽음의 위생’을 갖추도록 돕는다.

저자는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사망, 잉글랜드 헝거포드 총기 학살, 9·11 테러, 발리 폭탄 테러 등 세계 곳곳의 주요 사건·사고 현장을 조사한 영국의 대표적 법의학자다. 처음부터 의사, 그것도 법의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법의학은 의학이면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의학 지식으로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고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도록 도와주고, 무고한 사람을 구해주고, 법정 증언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기여하는 삶에 매료됐다.”

피해자는 죽었지만 “사건은 종종 살아 돌아온다”. 공권력의 ‘무리한 제압에 따른 자연사’도 그런 경우다. 감옥에서 죽은 수감자를 부검하러 가 경찰 브리핑을 받는데, 왠지 내용이 부실했다. 죽은 사람은 20대 나이지리아인. 검안에서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부상이 없었다. 검사해보니 그는 적혈구 관련 유전성 질환이 있었다.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망의 주원인은 극심한 폐렴으로 나왔다. 그는 폐렴과 유전성 질환이 만나 자연사한 것이다. “엎드린 자세로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호흡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자세를 취하게 해줬더라면 그는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멍든 부위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심한 경찰의 조치가 있었을 것이다. (…) 안전하게 제압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과 이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나는 이런 내용을 보고서에 신중하게 기록했다.”

부검만큼이나 유족의 슬픔과 마주하는 일이 중요했다고 그는 비중 있게 쓴다. 수없이 들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죽을 때 고통을 겪었습니까? 오랫동안 괴로워했으면 안 되는데!” 이 법의학자는 객관적 방식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게 혼란스러운 감정을 완화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얼마만큼의 고통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고통을 받았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주검 자체에는 고통의 지속 시간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없다.

저자가 갈파한 죽음의 동의어는 “과정”이다. “부패가 인간의 몸을 지구라는 화학물질 저장고로 돌려주는 중요한 단계라 생각한다면 혐오감이 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부패라는 궁극적인 청소 과정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창피한 모습을 남긴다는 건 속세의 걱정일 뿐이다.” 죽음과 함께하는 일상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질 때쯤 이런 문장을 만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삶에서 만나는 작은 기쁨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았다. 빨갛고 노란 나뭇잎의 카펫을 신나게 뛰어다니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다른 손… 나는 그런 기쁨을 마음껏 음미한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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