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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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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가 윤희에게

‘나’ 없이 살아낸 당신,

김희애 주연의 영화 <윤희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19-11-16 06:44 수정 2020-05-02 19:29
리틀빅픽처스 제공

리틀빅픽처스 제공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임대형 감독 전화 인터뷰, 영화시사회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편지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To. 윤희에게

질끈 묶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일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볼 때도, 집에서 사진첩을 들춰볼 때도, 거리를 걸을 때도. 어딘가를 보는 눈빛은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당신의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랑 아빠랑 이혼할 때 내가 왜 엄마랑 산다고 한 줄 알아?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서.” 어린 딸에게도 보였던 외로움은 얼마나 깊디깊은 건가요.

영화 (11월14일 개봉)에서 중년 여성 윤희(김희애), 당신의 팍팍한 삶을 보았습니다. 학교 급식 조리사로 일하고, 이혼하고 고등학교 3학년인 딸 새봄(김소혜)과 둘이 살고 있네요. 가끔 술을 마시고 찾아오는 전남편의 방문 외에 특별한 일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네요. 아니,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 같네요.

어느 날 일본에서 온 편지를 받는군요. ‘윤희에게’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첫사랑이 보낸 ‘러브레터’네요.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첫사랑, 20년 만의 편지

이 편지를 받고 예정에 없던 일본 여행을 떠나네요, 딸과 함께. 당신이 간 홋카이도현의 오타루는 눈의 땅이네요. 허리까지 쌓이는 눈이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첫사랑을 보았습니다. 당신처럼 쓸쓸한 눈빛의 중년 여성 ‘쥰’(나카무라 유코)을. 한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부모의 이혼으로 일본에 돌아가 고모와 살고 있습니다. 수의사로 일하는 쥰은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네요.

택시를 타고 첫사랑이 있는 집 앞까지 간 당신은 쥰이 집에서 나오자 숨어버립니다. 그 먼 곳까지 그를 만나러 가서 숨을 수밖에 없는 당신. 무엇이 당신을 막은 겁니까. 그렇게 그를 만나지 못하고 한 술집에 들어가 그를 만난 것처럼 말하는 당신은 슬픈 거짓말을 하네요.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고. 그 시간 쥰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다른 여성에게 말합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라고,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이성애 중심의 일본 사회에서 쥰 역시 당신처럼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왔네요.

그동안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던 당신은 쥰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합니다. 동성애자인 자신을 부정한 가족 이야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지난날, 오빠의 소개로 강제로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오빠만 대학에 보내고 자신은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그런 그를 가엽게 여긴 어머니가 당신에게 카메라를 사줬다는 이야기를. 그제야 당신을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오랫동안 억눌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이성애 가부장적 가족제도 안에서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살아온 그가 감내할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생이 “벌(罰)처럼 느껴졌다”는 당신의 말은 사는 게 얼마나 고통이었는지를 말합니다.

제작 단계에서 당신이 나오는 영화의 제목은 이었다고 하네요. 영문 제목은 ‘문릿 윈터’(Moonlit Winter)고요.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달이 자주 카메라 앵글에 잡혔어요. 보름달, 초승달, 반달. 임대형 감독이 말해주더군요. “영화 속 달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메타포(은유)”라고요.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어가듯 서서히 원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달처럼, 윤희 당신이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른다는 뜻도 있고요.

윤희(김희애·왼쪽)가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윤희(김희애·왼쪽)가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만월’ 차오르듯 나 찾기

당신과 쥰의 사랑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들의 사랑도 보여주네요. 쥰과 사는 고모는 아주 오래전 6개월 정도 짧게 만난 그 사람이 아직도 가끔 그립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평생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고모. 조카 쥰을 키우며 살아온 고모의 마음 한구석에도 그리운 사랑이 있었네요. 당신의 10대 시절 모습을 많이 닮았다는 딸 새봄의 사랑은 풋풋합니다. 학교 운동장에 버려진 장갑을 수선해 한 짝씩 낀 새봄과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일본 여행까지 따라온 경수와 새봄이 엄마 모르게 비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고요하고 잔잔한 영화에 웃음을 퐁당퐁당 던집니다. 당신과 쥰이 연애하던 시절 모습도 이랬을까요?

당신이나 쥰이나 옆에서 응원을 보내는 존재들이 있네요. 쥰의 곁에는 고모가, 당신 곁에는 딸 새봄이. 쥰과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 분은 고모네요. 쥰이 20년간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부쳐주었으니까요. 딸 역시 일본 여행을 제안하며 당신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그들의 말 없는 응원은 연대의 다른 이름이네요.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듬고 위로하면서 계속 살아가자고 손잡아주는 것 같아요.

드디어, 당신은 20년 만에 쥰을 만나네요. 당신을 먼저 알아본 쥰이 부릅니다. “윤희니?” 걸음을 멈추고 쥰을 본 당신은 그와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가만히 서서 바라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네요. 20년 만에 너무나 보고 싶었던 첫사랑을 본 당신이 숨죽여 웁니다. 그리고 말없이 쥰과 거리를 두고 나란히 눈길을 걸어가네요. 함께 걷는 그 눈 내리는 거리가 아주 포근해 보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딸이 한 식당에 면접을 보러 가는 당신을 찍습니다. “작은 식당을 차리고 싶다”며 처음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당신은 그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고 있네요. 그제야 영화 내내 잘 웃지 않던 당신이 웃습니다. 내레이션으로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잘 지내니? 네 편지를 받자마자 너한테 답장을 쓰는 거야. 나 역시 가끔 네 생각이 났고 네 소식이 궁금했어.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전 일이 돼버렸네.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윤희로 산다는 것

당신은 그동안 꼭꼭 숨겨온 나를 찾아갈까요? 진짜 자기 모습이 어땠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당신. 앞으로 새봄의 엄마가 아닌 윤희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임 감독은 이렇게 말했어요. 이 영화는 중년 여성이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아를 찾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성장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고요. 당신은 이제 새봄의 엄마가 아니라 레즈비언인 윤희만이 그릴 수 있는 중년 여성 서사를 만들어가겠네요.

영화는 내내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용감한 일이라고 영화는 전합니다. 그 누군가는 더 많은 용기를 내야 하는 사랑.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품은 세상의 모든 윤희에게 영화는 어떤 사랑도 괜찮다고 위로하고 다독입니다. 홀로 아파하고 숨죽여 울고 있을 ‘윤희’들에게 윤희가 전합니다.

From. 윤희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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