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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가 간다

2030 ‘직통령’ 꿈꾸는 교육방송 캐릭터 펭수
등록 2019-11-14 01:50 수정 2020-05-02 19:29
유튜브를 통해 예능 대세로 떠오른 EBS의 캐릭터 ‘펭수’. 자이언트 펭TV 화면 갈무리

유튜브를 통해 예능 대세로 떠오른 EBS의 캐릭터 ‘펭수’. 자이언트 펭TV 화면 갈무리

EBS 지하 소품실에는 펭귄이 살고 있다. 나이는 열 살, 키는 210㎝로 남극 유일의 자이언트 펭귄이었던 펭수(남극 ‘펭’씨에 빼어날 ‘수’)는 ‘뽀로로’ 같은 스타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한국의 인천 앞바다까지 헤엄쳐왔다. (오다가 잘못해서 스위스를 거쳤는데, 간 김에 요들송을 배웠다고 한다.) 머리에 미역줄기를 매단 채 오디션을 보고 EBS 연습생으로 발탁된 펭수의 유튜브 채널 가 개설된 것은 지난 3월, 초등학교에도 가고 민속촌에도 가며(새라서 입장료 할인은 받지 못했다) 꾸준히 구독자를 모으던 펭수가 최강 신인으로 떠오른 계기는 9월 중순 업로드된 ‘EBS 아이돌 육상대회’(이육대) 영상이었다.

남극에서 온 벼락스타 펭수

펭수를 비롯해 번개맨, 뚝딱이, 뿡뿡이 등 익숙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콘셉트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EBS라는 조직 안에서 위계를 드러냄으로써 의외의 재미를 보여준 이육대는 이들에 대한 추억을 지닌 20~30대 성인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조회 수 200만 건(2편 합산)을 넘겼다. 이 영상 하단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은 “애들(이었던 것들) 보라고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기획됐던 펭수는 EBS 유니버스라는 ‘착한’ 세계관 안에서 독보적으로 자신만만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로 스타덤에 올랐다. 좋아하는 소설은 , 좋아하는 노래는 거북이의 , 좋아하는 간식은 빠다코코낫인데다 간에 좋은 실리마린을 복용하고 뜨끈한 국밥을 먹기 위해 날아갈 듯 뛰어가는 이 열 살짜리 펭귄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제작진은 수의사를 동원해 펭수의 엑스레이 사진까지 공개하며 의혹을 불식했고, 펭수와 ‘동년배’임을 자처하는 ‘어른이’ 팬들 역시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듯 펭수를 믿는다.

“바라던 취업을 했는데 사회생활의 씁쓸함을 알아가는 중이야. 출퇴근길에 보는 펭수가 내 생활의 유일한 낙이야.” 펭수의 영상 아래서 종종 보는 내용의 댓글이다. 어른이 되어도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졸업해도, 취업해도 외롭고 지치고 서러운 날은 계속 찾아온다. “내가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납니까? 그러니까 저는 힘내라는 말보다 ‘사랑해’라고 해주고 싶습니다”라는 펭수의 씩씩한 조언은 위로받고 싶은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지난해에는 를 비롯한 외국 동화 속 캐릭터가 화자인 책들이 쏟아져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동시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함께 치이며 ‘살아가는’ 사람 아니 펭귄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 있다. “자신감은 자신한테 있어요. 근데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자신을 믿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해요.” 단순하고 원론적이지만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기에 더 효과적이다. “희망을 버렸으면 다시 주워 담으세요. 희망은 남의 게 아니고 내 거예요”라는 유튜버 박막례씨 말에 위로받았던 ‘편’들처럼, 펭수에게는 열성적인 ‘펭클럽’이 있다.

펭수 펜클럽 ‘펭클럽’

그러나 이른바 펭수의 ‘본체’라는 연기자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제작진의 입장도 “펭수는 그냥 펭수”다. 뛰어난 순발력의 목소리 연기를 남성(추정)이 맡고 있지만 펭수에겐 성별이 없다는 설정은, 버닝썬 사태를 비롯해 수많은 사건을 지켜보며 남성 스타의 팬이 된다는 게 그 자체로 위험부담을 지는 것임을 알게 된 팬들에게 일종의 안전망으로 작동한다. 여성인 이슬예나 PD가 기획과 연출을 맡고, 성인 팬이 많음에도 기본적으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맞는 정서를 잃지 않는다는 점도 비교적 마음 편히 펭수에게 빠져들 수 있는 이유다.

‘무해한’ 동시에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의 구독자 수는 11월 첫째 주 기준 43만6천 명이 넘었다. “힘들 때 연락 주세요^^”(KBS)를 비롯해 “곧 월동대원 발대식이 있을 거야. 같이 갈까, 남극?”(극지연구소), “너의 참치는 내가 책임질게.”(사조그룹) 등 공공기관과 기업 공식 계정 역시 줄지어 펭수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유튜브가 극도의 주목 경쟁으로 혐오표현 전시의 장이 되고, 경쟁력을 잃어가는 지상파 예능 역시 유튜브 스타를 데려와 ‘선을 넘는’ 언행을 내보내며 최소한의 품위마저 포기하는 시기에 EBS가 교육방송이라는 정체성과 유튜브 플랫폼의 특성에 맞는 고유 콘텐츠로 타 방송사가 생각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이상형은 나 자신

펭수는 최근 SBS 라디오 , MBC 라디오 에 이어 MBC 예능프로 에서도 활약했다. 레거시미디어(전통 미디어)가 뉴미디어에서의 인기에 쉽게 숟가락을 올리는 대신 자신들의 인프라와 노하우를 활용해 뉴미디어에 적용한 결과다.

시시때때로 “김명중!”(EBS 사장 이름)을 외쳐 사람들을 웃기고,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없으며 이상형은 나 자신”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펭수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무엇일까. 지난 5월 ‘제1회 펭수 표현하기 대회’가 열렸다. 많은 참가자가 다양한 미술 작품으로 펭수를 담아냈고, 대회가 끝난 뒤 모든 어린이와 어른이 상을 받았다. 다른 어린이들의 이름이 먼저 불리는 걸 듣고, 자신은 상을 타지 못할 거라 생각해 울고 있던 한 어린이가 펭수에게 상과 칭찬을 받고 활짝 웃는 모습은 어른들이 잊고 있던 마음을 다시 알려주었다. 펭수는 한 인터뷰에서 교육이란 “살면서 배우는 거,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펭수의 삶 자체가 배움과 가르침이 되길 기대한다. 펭수가 우주대스타가 될 그날까지, 펭펭!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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