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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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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전문가

7년 사귄 남자친구에 대해서

주변에 ‘그의 마음’을 자꾸 물어보는 H
등록 2019-11-13 02:12 수정 2020-05-02 19:29
야구 경기 하프타임 때 한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FC서울 제공

야구 경기 하프타임 때 한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FC서울 제공

“그(녀)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전적 문장이다. 많은 이가 ‘그 마음’을 몰라서 애태운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을 당최 모르겠으면, 그가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지 보길 권한다. 사기꾼이 아닌 이상 마음 없는 사람에게 돈과 더불어 시간까지 쓰지는 않으니까. 만약 그가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이라면? 거꾸로 내 돈과 시간을 아껴주는지 보면 되지 않을까?

H는 7년 사귄 남자친구에게서 어느 날 주얼리 브랜드 서너 가지 중 어떤 게 좋으냐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는 드디어 프러포즈를 하려나보다 기대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렸다. 마침 남자친구가 자기가 쏜다며 평소와 달리 근사한 식당으로 약속 장소도 정한 터라 심증이 굳었다. 남자친구는 H보다 월급이 적고 가족 생계도 도와야 해서 씀씀이가 크지 않다. 만남도 주로 혼자 사는 H의 집에서 이뤄진다. 뜻깊은 날이니 기왕이면 와인도 한 병 곁들였으면 했는데 남자친구가 자긴 술 생각 없다 해서 하우스 와인 한 잔만 시켰다. H 혼자 긴장한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끝내 프러포즈는 없었다. 식당에서 나오던 길에 지나가듯이 물었다. “자기, 며칠 전에 주얼리 브랜드 왜 물어본 거야?” 남자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어, 내 친구 용팔이가 여친한테 프러포즈한다기에.” 당황스러워, 버벅대며, 또 물었다. “그, 그런데 오늘 왜 여기서 밥 먹은 거야?” 돌아온 대답. “어, 그거 용팔이가 스테이크 식사권 생겼는데 자기 여친은 고기 안 먹는다면서 줬어.” 순간, 7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용팔이와 그 여친은 사귄 지 7개월도 안 됐다.

H의 남자친구는 결혼에 늘 뜨뜻미지근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다고 했다. 하고 싶은데 미루자는 건지, 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H가 속상해하면 이런 말로 달래줬다. 만약 결혼을 하면 너랑 할 거라고. 연인 간의 ‘정서적 착취’와 ‘희망고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상 프러포즈’까지 겪은 뒤 H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문제는 결행을 못하고 자꾸 주변에 물어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헤어져야겠지?” “취향도 같고 세계관도 비슷하고 솔직히 이만한 남자 없는데.”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 “둘이 벌면 시댁에 좀 뜯겨도 먹고살 걱정은 없는데.” 모두 주변 사람의 조언이 아니라 H 본인의 토로다. H의 남자친구가 다른 건 몰라도 H의 시간을 빼앗는 건 틀림없다. 이뿐만 아니라 H 친구들의 시간도 빼앗는다. 그보다 더 긴요한 일을 겪는 다른 친구도 있건만, 만나면 블랙홀같이 H 남자친구 얘기로만 점철되니 실례지만 친구들은 몹시 부담스럽다. H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역할’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밥벌이는 물론이고 연애를 포함한 여러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어떤 역할이든 크고 작은 돌봄, 수발, 해결, 감정노동이 따르지만 마냥 힘들기만 한 건 아니다. 덕분에 관계의 프리미엄이랄까, 전문성도 생기니까.

친구든 연인이든 부부든 ‘세상에 둘도 없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온 힘을 다해 서로를 위해주는 것이다. 능력이 많건 적건 상대가 제 깜냥에 최선을 다하는지는 오직 그와 사귀는 나만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붙잡고 “그의 마음은 뭘까요”를 애태우고 푸념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 정도 사귀었으면 내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전문가여야 한다.

속 깊은 친구들은 H에게 네 마음은 어떠냐고 물었다. H는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도 그 대상이 꼭 이 남자인지는 확신이 안 선다고 했다. 친구들은 대체 꼭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결혼이 왜 굳이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H는 그러게 자기도 그걸 잘 모르겠단다. 아뿔싸, H는 아직 제 삶에도 비전문가인 모양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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