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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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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가? 그렇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자

암 투병 경험자 박피디와 황배우의 이야기를 무대로 올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
등록 2019-11-13 02:06 수정 2020-05-02 19:29
11월1일 서울의 한 소극장에서 황배우(맨 왼쪽)가 암 경험자인 유튜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피디와황배우 제공

11월1일 서울의 한 소극장에서 황배우(맨 왼쪽)가 암 경험자인 유튜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피디와황배우 제공

“오늘 특별한 기념일 맞은 분 있나요?”

“….”

“없나요?”

“여기요! 여자친구 암 선고받은 날입니다.”

뮤지컬 공연 전 무대에 오른 배우 김성수씨가 ‘깜짝 이벤트’를 했다. 특별한 기념일을 맞은 관객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이었다. 항암 치료를 앞둔 여자친구와 공연을 보러 온 한 관객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김씨가 말했다. “네, 용기 내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여자친구분 힘내라고 박수쳐드리죠.” 관객이 힘차게 응원의 박수를 쳤다.

무심코 내뱉는 말에 상처

11월1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있는 다리소극장. 치료를 받는 암환자, 암 재발이나 전이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암 경험자와 가족 등 200여 명이 모였다. 뮤지컬 공연이 열렸다. 는 유방암 경험자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박피디(44·가명)와 황배우인 황서윤(37)씨가 겪은 암 투병과 암 치료 이후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암 경험 당사자의 이야기다. 방송 피디인 박피디와 뮤지컬 배우인 황배우가 이날 공연을 기획하고 대본을 썼다. 공연 이름 ‘아미고, 아미가’는 스페인어로 ‘친구’라는 뜻이다. 뮤지컬의 주인공 이름은 이들의 이름을 따서 박피디(배우 고혜란), 황배우(배우 여우린)다.

박피디가 말했다. “저희가 암 진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경험을 들려주면 같은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암 경험 당사자이기에 암을 겪은 이들의 상황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고요.”

뮤지컬은 공연 연습을 하는 황배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연습하다가 쉬는 시간에 황배우가 동료 배우들에게 “가슴에 멍울이 만져진다”고 이야기한다. 몸에 이상을 느낀 황배우는 검진을 받고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날 이후 그는 모든 일을 멈춰야 했다. 그의 이야기에 박피디 이야기가 교차된다. 박피디는 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방송 제작 일을 계속한다. 하지만 몸도 많이 아프지만 직장 동료들의 냉대로 힘들어한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우연히 만난다. 그때부터 그들의 인생 2막이 열린다. 암환자를 위한 일을 찾기 시작한다.

뮤지컬은 박피디와 황배우를 통해 암 경험자들이 겪는 사회 복귀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암을 이겨냈지만 사회 편견 때문에 우울한 날을 보낸다. 암 투병을 했다는 이유로 취업도 결혼도 녹록지 않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었던 황배우는 뮤지컬 감독에게 “암환잔데 연기할 수 있겠어? 끝이지”라는 말을 듣는다. 동료 배우들은 그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이렇게 말한다. “어제 같이 밥 먹어서 나한테도 (암이) 옮는 거 아니겠지?” “우리 옆집 아주머니도 유방암이셨는데 잘 지내시다가 재발해서 죽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그들의 말은 황배우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의 독백에 그 상처와 아픔을 담았다. “내 나이 서른넷 암환자라는 낙인. 살면서 많은 것을 계획했고, 곧 이룰 참이었는데… 내가 꿈꿨던 미래는 무너져버렸습니다.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싶은데… 수많은 편견과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박피디는 암 진단을 받고도 방송 제작 일을 계속했다.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자기 일을 하기 위해 버텼다. “(동료들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더 악착같이 일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일을 그만둬야 할까봐, 이대로 세상에서 버려질까봐, 쓸모없는 인간이 될까봐.” 그의 독백 역시 사회와 이어진 유일한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절규였다.

아무 말 없이 다리를 주물러준 언니

이날 뮤지컬을 본 현정애(57)씨 역시 암 경험자다. 지난해 암 경험자 자조모임에서 박피디와 황배우를 만났다. 그는 뮤지컬을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박피디와 황배우가 직장에서 겪은 일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직장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저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공감이 가요. 사람들이 암환자라고 하면 자리를 피하거나 외면해요. 친인척도 그래요. 암이 전염병도 아닌데 같이 밥을 안 먹으려 했거든요.” 그는 암 투병을 하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 “박피디와 황배우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치켜세운다. 그들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인 공연을 보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무대 아래에서 공연을 본 박피디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을 보니 민망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특히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 눈물샘이 폭발했다. “아버지가 박피디에게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목돈을 주고 가는 장면이 나올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그때 아버지와 제가 떠올랐어요.” 그에게 가족은 다시 살 수 있게 해준 존재다. “암 진단을 받고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생각할 때였어요. 언니가 저에게 ‘너는 꼭 필요한 존재다’라고 말했어요. 당시 제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는데, 그 말이 큰 힘이 됐어요. 한동안 우울해서 방에만 있을 때는 언니가 조용히 들어와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리를 주무르고 나가는 거예요. 한 달 동안요. 나중에 들으니, 언니는 다리를 주무르며 날 아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대요.”

황배우는 박피디를 만나며 새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암 경험자인 그가 내민 손을 잡고 2016년 5월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이제는 무대에 뮤지컬도 올렸다. “박피디님 만나기 전에 ‘내가 뭘 잘못했길래 암에 걸렸나’ 그런 생각에만 갇혀 있었어요. 많이 힘들었어요. 나만 낙오자, 패배자가 된 것 같았어요. 그러나 같은 암을 앓았던 박피디님을 만나 무언가를 시작할 힘을 얻었어요.”

뮤지컬 후반부에 박피디가 황배우에게 “우리 생각을 바꿔보자. 암이 우리의 약점은 아니야.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암 자격증이 있잖아. 우리가 제일 잘하는 거, 암환자를 위한 일을 하자”라고 이야기한다. 황배우는 실제 박피디에게 그 말을 듣고 이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게 됐다. 그 뒤 암 경험자들의 고민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를 하게 된 거다.

“우리에겐 암 자격증이 있잖아”

황배우와 박피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 직업이 피디와 배우잖아요. 그동안 해온 일을 바탕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암 경험자들의 경험을 공연으로 만들자라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들은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 문제를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 갖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말이다. 또한 절망에 빠진 암 경험자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에너지도 전하고 싶었단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내 얘기를 듣고 도와줄 이들도 있을 겁니다. 혼자 외롭게 고립돼 있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합니다.” 박피디가 힘주어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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