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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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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배우자의 추궁에 시달리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하면서 돌아눕던 밤과 비슷한 경찰 수사
등록 2019-11-06 01:05 수정 2020-05-02 19:29
2016년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아무개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아무개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사는 부부싸움과 비슷하다. 수사기관에서 피의자와 함께 조사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까지 결혼생활에서 파악한 부부싸움의 양상은 이렇다. 보통 배우자의 심기를 건드린 무언가(그게 뭔지는 나도 모른다)가 있고 배우자가 내게서 듣고 싶은 얘기(나의 사과)가 있다. 이런저런 토를 달지 않고 초반에 ‘통석의 염’을 표현하면 부부싸움이 조기에 끝나고 잠도 일찍 잘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가 듣고 싶은 얘기가 나올 때까지 밤새도록 싸움이 지속되거나 며칠 동안 이어지곤 한다.

“둘째 언니가 죽었다” 8살 남동생의 구체적 진술

피의자 옆에 앉아 관찰해보면 수사관 얼굴에 아내 얼굴이 겹쳐 보일 때가 많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피의자 얘기를 들어주기보다 이미 듣고 싶은 얘기를 정해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미 아니라 답했고 다른 얘기로 넘어간 상황에서도 어느새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기 일쑤다. 훌리건(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무리)처럼 난입해 “아까 분명히 안 했다고 했잖아요. 왜 이미 답한 걸 또 물어보는 거예요”라고 쓰인 배를 까 보이고 싶단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짓지 않은 죄를 자백하기도 한다. 진범이 있는데도 억울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처벌했던 한국의 사례들–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김순경 사건- 에도 범인으로 오인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백했다. 유죄가 인정되면 극형까지 예상되는 중범죄였는데도 왜 자백한 걸까? 사람들은 고문 때문이라고 손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고문이 없어도 자기가 짓지 않은 죄를 자백하기도 한다. 심지어 묻는 말에 그저 ‘네네’라고 수동적으로 답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구체적으로 진술하기도 한다.

2007년 충남 보령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집에서 14살 둘째 딸이 한밤에 사라졌는데 경찰은 당시 10살 여동생에게서 중요한 진술을 확보했다. ‘첫째 언니가 사라진 둘째 언니를 방으로 데려갔고 조금 있다 쿵 소리가 났다. 방에 가보니 둘째 언니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있었다.’ 그보다 두 살 어린 8살 남동생의 진술은 더 구체적이었다. ‘둘째 누나를 흔들어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둘째 누나의 코 부분에 손을 대봤는데 숨을 쉬지 않았다.’ 경찰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첫째 딸을 경찰서로 불렀다. 경찰서로 불려온 첫째 딸은 ‘다툼 끝에 둘째를 밀쳤는데 벽에 머리를 부딪힌 동생이 사망했다. 엄마가 내 죄를 숨겨주기 위해 둘째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며 하루 만에 혐의를 인정했다. 경찰은 사망한 둘째 딸의 주검을 찾으려고 아이들의 엄마를 추궁했다. 조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됐지만 엄마는 혐의를 부인했다.

죽었다던 둘째는 살아서 제 발로 집에 돌아왔다. 첫째가 범행을 자백한 지 13일 만의 일이었다. 둘째는 귀가하지 않는 엄마를 찾으러 한밤중에 집을 나섰다가 인근에 사는 30대 남자에게 납치돼 남자의 집 장롱에 감금돼 있었다. 그 13일 동안 경찰은 갇혀 있던 둘째의 행방을 찾는 대신 엄마를 불러 주검의 위치를 대라며 추궁했다. 동네에는 첫째가 둘째를 죽이고 부모는 주검을 유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끝내 둘째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이 사건의 결론은 어찌 되었을까?

경찰은 수사 초기 탐문 과정에서 첫째와 둘째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정보를 얻었다. 경찰은 학교며 놀이터며 길거리에서 10살, 8살 동생들에게 집요하게 접근했다. 마침내 막내로부터 둘째가 사라지던 날 밤 첫째와 둘째가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첫째가 때렸니?” “둘째가 넘어지지 않았니?”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셋째를 불러 “막내가 다 이야기했다”며 추궁했고, 그다음에는 첫째를 불러 “이미 두 동생이 다 이야기했다”며 추궁한 끝에 자백을 얻어냈다.

오판 사례 25%가 허위 자백

아이들은 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자세히 얘기한 걸까? 진실이 밝혀진 뒤 아이들이 했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는데 경찰이 계속 거짓말한다고 혼냈다. 그래서 경찰한테 들은 대로 말했더니 ‘그럼 됐다’고 했다.”(셋째의 진술) 경찰은 기대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셋째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셋째가 구체적인 진술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경찰이 반복적으로 한 질문 속에 이미 충분히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가 했던 구체적인 진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거짓말한 다른 동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자백했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동생이 돌아오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첫째의 진술)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동생들이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게 두려워 허위 자백을 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이 사건이 보여줬다.

고문 없는 허위 자백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고문이 없는 이상 허위 자백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부분 관심은 고문이나 가혹 수사 방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DNA 검사 기법이 등장하며 오판 사례가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었다. 오판 사례 중 25% 정도에서 허위 자백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허위 자백은 구조적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일본 범죄심리학자 하마다 스미오는 허위 자백의 발생 원인 연구에서 그 원인으로 차단, 인격적 비난, 자포자기, 전망의 상실, 현재 고통과 장래 고난, 처벌의 비현실감, 부인할 때 불이익 등을 들었다. 이 분석이 맞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하지만 형사 변호를 자주 하는 내 입장에선 꽤나 타당해 보인다. 형사 변호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독자도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배우자의 추궁에 시달리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하면서 돌아눕던 밤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은가?

진술 과정 전반 녹화해야

수사가 부부의 침실과 다른 점은 공적 절차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끊임없이 공공 감시를 받아야 하고, 개선 방안에 대해서는 공적 토론을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자백으로만 달려가는 신문 기법을 대신할 새로운 신문 기법의 개발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진술 과정 전반을 녹화할 필요가 있다. 수사 초반에 시원하게 자백한 건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추궁받다 마지못해 자백한 건은 분명 차이가 있음에도, 같은 무게의 자백으로 취급받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 국민이 영상장비(스마트폰)를 들고 다니는 지금, 수술실 녹화가 논의되는 지금, 그리고 수사 개혁 논의가 가장 뜨거운 지금, 왜 수사 과정 녹화 문제가 전면화되지 않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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