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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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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랑해서 억울한 이들에게

관계의 약자들은 초라하지 않다
등록 2018-12-01 08:42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영화 와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을 염탐하다 분노와 애걸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다. 이 손가락은 누구 건가? 탓할 시간 없다. 빨리 지워야 한다. 삭제를 눌렀는데 내 창에서만 사라진 것 같다. 그쪽 창에서도 지워졌는지 확인하려고 실험에 돌입한다. 아무 계정이나 파서 내가 나한테 쪽지를 보냈다 지운다. 사라지나? 그 난리를 치는 동안, 답이 오고 만다. 또 망했다. 우아하게 이별하긴 이생에선 글렀다. 눈물, 콧물, 바짓가랑이 추태 삼박자를 아낌없이 채우고 말 모양이다.

약자가 된다는 것

약자가 되는 건 두려운 일이다. 균형이 깨진 틈에서 상처가 자란다. 연애는 때로 자기 존재를 건 샅바싸움 같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는 엎치락뒤치락 잔인한 역동을 드러낸다. 1950년대 영국 런던, 레이놀즈는 ‘천의무봉’ 드레스 디자이너다. 이 깐깐한 남자는 숨 쉬는 데도 규칙이 있을 거 같다. 아스파라거스를 기름에만 조려 먹는다. 버터는 ‘절대로’ 안 된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누구도 빵에 버터를 바를 때 소리를 내면 안 된다. 그가 자기를 지키는 방식이다.

레이놀즈의 드레스 제작실은 그의 법이 다스리는 성채, 사랑을 구걸했던 뮤즈들은 드레스 한 벌씩을 얻고 퇴장했다. 이 성에 레스토랑 종업원 알마가 피팅모델이자 연인으로 들어온다. 연인이라기엔 관계가 수직적이다. 레이놀즈는 드레스를 만들고, 알마는 ‘입혀진다’. 아침 식탁에선 당연히 입 다물어야 한다. 하지만 알마는 알마, 처음부터 알마이고 끝까지 알마다. 알마는 일방적 능동과 수동이 지배하는 관계의 샅바를 틀어쥐고 엎어치기를 시도한다. 상대를 무방비 상태의 아기, 온전히 자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위험한 도박을 벌인다. 목숨을 건 균형 찾기다.

이제 레이놀즈만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 레이놀즈도 그 게임의 룰을 알고 있다. 그는 철저한 ‘약자’의 순간을 받아들인다. 알마가 준 독버섯을 먹고 앓으며 오로지 알마에게 자기를 맡기는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웠는지 모른다. 알마는 그에게 ‘약자’의 자유를 주었다. 레이놀즈는 진짜 ‘목숨을 걸고’ 약함을 받아들여 자기가 지은 성에 갇혀 사는 저주에서 풀려났다.

언제는 라면 먹자 꾀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불어터진 라면 취급이다. 허진호 감독의 에서 멀대 같은 영우는 청승맞다. 언제 균형에 균열이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느닷없이 여름이 와버렸다. 기다림은 ‘약자’인 영우의 몫이다. 이불 위에 누워 오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있는 영우는 무력하다. 폴더폰을 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고통은 그의 몫이다. 무슨 이런 불공평한 게임이 다 있나.

영우는 피해자일까?

그 아슬아슬한 균형은 별별 것으로도 깨진다. 일단 기울어지면 가속도가 붙는다. 을은 더 애간장이 타고, 갑은 뜨거워 뒤로 물러나고, 그러기에 을은 더더욱 애간장이 타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또 타고…. 열정을 투자할수록 더 약자가 되고, 약자가 될수록 더 투자하게 되는, 무슨 이런 치사한 게임이 다 있나.

델리스 딘이 쓴 (원제 The Passion Trap)은 균형이 깨진 관계 개선용 처방전이다. ‘밀당’의 기술이 아니다. 밀당한답시고 전화를 부러 늦게 받고, 답장을 부러 안 하고, 관심 없는 ‘척’하면 할수록, 그 ‘척’하는 데 에너지가 드니 ‘약자’의 불안은 더 커진다. 균형을 찾는 방법은 관계의 약자가 상대에게 쏟는 에너지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 스스로 서는 것밖에 없다. 해봐라, 되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당신에게 나는 무슨 의미야가 아니라 나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내 가치를 타인이 아니라 내게 묻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버티고 서야 ‘건강한 거리’가 생긴다고 저자는 말한다. 궁극의 목표는 관계의 유지가 아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건 ‘나’로 버텨보아야 하는 까닭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의 멀대 같은 상우는 ‘피해자’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상우 한 사람이다. 덧없이 가버리는 순간들을 바라보며 우는 이는 상우이고, 평생 남편을 그리다 숨진 할머니를 이해하는 이도 상우이고, 마지막, 억새밭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 감은 채 바람을 만끽하는 이도 상우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정희진, )

사실, 이 모든 게 뇌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중독은 모두 도파민 수치의 증가와 관련 있다. 그렇다면 낭만적인 사랑도 중독이란 말인가? 그렇다.”(헬렌 피셔, )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금주와 똑같은 이별 매뉴얼을 들려준다. 단 한 잔도 안 되는 것처럼, 단 한 통화도 안 된다. 뇌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달리고 명상하고 이야기하라고 한다.

사랑받는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것

동네 복지관 요가학원에서 다리를 찢으며 구시렁거린다. ‘중독도 아주 더러운 중독.’ 이 중독은 나에게 다가가는 가장 험난하고 가까운 길이다. 그 밟지 않을 수 없는 진흙탕을 건너며, 볼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조금 보았다. 울퉁불퉁, 엉기성기, 뒤죽박죽, 그래도 나인 나, 그런 나의 결핍과 소망들 말이다.

“사랑의 임무는 다른 방식으로는 잡히지 않는 인간 생활의 주파수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흥겨운 주파수도 있고 슬프거나 외로운 주파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주파수와 맞아떨어지면 우리의 정서적 지평이 넓어진다는 사실입니다.”(마리 루티, )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약자가 되길 자처하며, 바닥으로 떨어질지라도, 연애의 평균대 위에 오르나보다. 그 위에 서 있으려면 다리 근육을 키우는 수밖에, 서 있다보면 억새밭을 스쳐 내 몸을 채우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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