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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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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작은 역사를 씁니다

‘모든 여성의 이야기는 역사다’

여성들의 자서전 만드는 소셜벤처 ‘허스토리’
등록 2018-11-24 07:42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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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있는 탁자에 정갈한 책이 여러 권 놓여 있다. 책을 들추니 빛바랜 사진과 살아온 이야기를 적은 글이 보인다. 평범한 어머니들의 자서전이다. 자서전 출판과 교육을 하는 ‘허스토리’에서 만든 ‘작은 역사’다. 허스토리는 주류, 남성 중심으로 쓰인 기존 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 특히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소셜벤처(사회적기업)다.

어머니들의 구어체 말 그대로 담기

11월19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책방에서 허스토리의 류소연(29) 대표와 주승리(26) 팀장을 만났다. 류 대표는 기자에게 허스토리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1호 자서전’을 보여줬다. 류 대표의 외할머니 자서전이다. “외할머니는 황해도 출신이고 1933년생이에요. 16살 때 고향에 부모님을 두고 피란 나왔대요. 그땐 고향에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았대요. 그런데 그 뒤에 부모님을 못 보셨어요. 외할머니가 그때를 떠올리며 ‘괜히 나왔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셨는데 그 말이 잊히지 않아요.” 류 대표는 그때 처음 외할머니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주 팀장은 어머니 자서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자서전을 만들며 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었다는 엄마의 꿈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이제 시간이 있지만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가 안 난다고 하셨어요. 슬펐어요. 우리 가족이 어머니의 발에 족쇄를 채운 것 같았어요.”

그들은 가족의 자서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2016년 여성들의 자서전을 제작하는 회사 허스토리를 만들었다. 역사학을 전공한 둘은 ‘여성의 시선으로 작은 역사를 기록하자’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했다. 어머니의 자서전을 만들고 싶은 자녀의 의뢰를 받아 ‘이 시대 어머니의 자서전’을 제작했다. 그들의 자서전 제작 원칙은 어머니들의 구어체 구술을 그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자서전을 읽으면 책의 주인공인 어머니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그맣게라도 장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완전히 집하고는 멀어지잖아. 저녁에 애기들 끼니도 못 차려주잖아. 집에 누구든 어른이, 시어머니든 친정엄마든 계셔갖고 애기들 챙기고 해줘야 된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니까 못하겠더라고.”(1951년생 복례) “고등학교 갈 때부터 집이 힘들어졌어. 그래서 상고를 갔어. 대학교 너무 가고 싶어서 상고에서 진학반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지. 대학에 붙었는데 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았어. 무슨 공부냐 하셨지. 그때는 그렇게 아버지가 밉더라구. 미웠어.”(1965년생 은영)

한국전쟁과 분단, 굴곡진 근현대사

여성의 시선으로 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허스토리’에서 만든 엄마들의 자서전.

여성의 시선으로 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허스토리’에서 만든 엄마들의 자서전.

자서전의 주인공인 어머니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부장제와 부계 혈통이 관념으로 굳은 사회에서 엄마인 여성은 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주 팀장은 “다들 딸이자 엄마로서 가족을 책임지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평생 자신의 이름을 지운 채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았다는 얘기다.

어머니들의 개인사에는 한국전쟁과 분단 등 굴곡진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은 할머니, 북녘에 있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실향민 할머니의 말 속에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류 대표는 “강제 징용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 할머니가 있었어요. 그때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어요. 저도 먹먹해졌어요. 할머니의 그리움이 저에게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이분과 내 감정이 교감하며 연결되는 느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류 대표는 자서전을 만들며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즐겁단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그만의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들이 온몸으로 겪은 인생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좋아요. ‘이건 책에 쓰지 마’ 하며 자녀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고요.” 그들만의 즐거움이 아니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둔 인생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어머니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단다.

허스토리는 자서전 쓰기 교육도 한다. 지난해에는 서울의 한 자활센터에서 ‘나를 기록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류 대표는 “워크숍에 참여한 분들이 처음에는 자서전 쓰는 걸 막막해했어요.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버지의 자전거, 어머니가 남겨준 반지 등 사물에 대한 기억을 쓰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그때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많이 우셨어요”라고 회상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자활 노동자들은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이고 외환위기 때 사업이 망하는 등 큰 위기를 겪었다.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가 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경제위기를 겪은 세대라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나만 아픈 시간을 보낸 게 아니구나’ ‘이렇게 힘든 게 내 탓만은 아니구나’라는 말을 하셨어요.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차분히 자신이 살아온 길을 정리하셨어요.” 류 대표가 말했다.

나와 당신의 연대기

아울러 페미니스트 자기 역사 쓰기 ‘나와 당신의 연대기’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나와 당신의 연대기’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자기 삶을 바라보고 그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크라우드펀딩 누리집 텀블벅에서 자서전 제작 가이드북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호응이 높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6일째 105명이 후원해 목표액 130%를 달성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삶이 사소하지 않고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자신보다 타인을 돌보는 삶을 요구받았고, 자신의 이름을 갖기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름 지어져왔습니다. 가부장제라는 벽과 어떤 식으로든 부딪치며 살아온 엄마의 삶을 엄마 당신의 말로 기록해보려 합니다.” ‘허스토리’(her story)를 기록하는 허스토리의 다짐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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