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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함정에 빠지지 말길

사랑에 빠진 딸에게
등록 2018-11-21 05:10 수정 2020-05-02 19:29
연합뉴스

연합뉴스

아이들이 어려 한창 손 많이 가던 시절에는 주말마다 밖으로만 돌아 부아를 돋우던, 아는 언니의 남편분이 어느샌가 주말마다 집에만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손발 오글거리는 메시지도 보내 왔단다. “당신은 나의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귀한 황금, 당신과 함께인 지금이 정말 좋아요.” 철 지난 ‘3금’ 아재 멘트에는 아지매 멘트로 응수할밖에. 언니의 답변은 이랬다. “그 마음을 현금, 입금, 지금.”

그래, 사랑은 표현하는 거다. 나와는 다른 인종이 아닐까 종종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의 사랑타령도 ‘표현’에 방점이 있다. 가령 초등 6학년 여자아이들에게 이 가을은 “이대로 고백 한번 못해보고 졸업하면 어찌하나” 울부짖는 계절이다. 고백을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게 중요하다. 제 감정에 충실해서다. ‘이 유부우동 정말 맛있어!’ 감탄하듯이 ‘나는 걔가 정말 좋아!’ 외친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성격에 따라 편차가 있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겠으나 이른바 ‘요즘 아이들’의 중심 문화는 그래 보인다.

여러 면에서 평균치에 수렴하는 내 아이도 드디어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데 마침 그 아이가 눈에 띈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학교 안 가는 주말을 기다리던 아이가 요새는 주말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아이를 못 봐서란다.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부서에 있으면 회사 가고 싶은 거랑 같은 거니. (아, 그래도 회사는 싫구나.)

‘빼빼로데이’를 앞두고는 과자 겉봉을 칼로 잘라 편지까지 동봉한 뒤 그 아이 서랍에 넣어뒀다는데 별다른 반응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들이대 놀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에 어울려 축구하고 방과 후 같이 장난치는 일과에는 변화가 없다는데. 며칠 지나봐야 알겠지만 왜 내가 시험 본 기분인지 모르겠다.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백을 하고 얼마나 많이 ‘까일’까. 그리고 얼마나 클까. 바라건대 속앓이만 하거나 지레 포기하지 말고 기질대로 성향대로 도전하는 쪽이었으면 좋겠다. 실패하고 쪽팔리더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관계의 상투성에 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소하게는, 내 생일인데 혹은 기념일인데 선물 뭐 해주나, 기대하는 거. 이 짐 무거운데 들어주지 않나, 기다리는 거. 지난번에 내가 이러했으니 이번에는 자기가 저러하겠지, 믿는 거…. 기대하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막연히 믿지 않길 바란다. 대신 구체적으로 요구했으면 좋겠다.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연애는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본다. 당장 연애가 좀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괜찮다. 좋은 마음으로 호르몬의 축복을 바라는 수밖에. 조상 삼대가 나라를 구했거나 전생에 좋은 일을 했다면 그 기운과 에너지도 어떻게든 전해지겠지. 한마디로 연애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문제는 연애에 성공한 뒤다. 공식 커플이 된 뒤, 여기서부터는 내 책임이다.

자식도 노력하지 않으면 예뻐 보이지 않는데 배우자(파트너)는 오죽하랴. 사귈 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이 단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단순한 이유다. 관계의 목적이 달라져서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남의 사람이라면 다 이해될 일도 내 사람에게는 유독 예민하고 억울해진다는 게 공식 관계의 함정이다. 배우자(파트너)도 이웃같이 사랑할 일이다. 정중히 설명하고 정확히 요청하는 게 좋겠다. 층간소음같이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모른다. 알아서, 잘하는 상대는 없다.

좋아하는 아이가 생긴 내 아이는 연일 기분이 좋다. 심부름도, 할 일도, 척척 한다. 그 아이에게 고맙다. 불러다 라면이라도 한번 끓여 먹이고 싶은데, 엄마는 웬만하면 나가 계시라고 하겠지. 쩝.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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