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포그 경의 ‘이유 있는’ 세계일주

동화 뒤에 숨겨진 경제 이야기 <동화경제사>
등록 2018-02-08 11:39 수정 2020-05-02 19:28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어쩌자고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도전한 것일까?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에 살던 매슈 아저씨는 왜 남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을까?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의 재미를 새삼 곱씹게 하는 책이 나왔다. 18~20세기 동화 15편을 경제학 전공자의 시각으로 풀이한 (최우성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이야기 배경이 된 사회경제적 상황, 작품 속 은유와 풍자, 출간 이후 벌어진 ‘해석투쟁’을 짚으며 동화 읽는 재미를 새롭게 직조한다.

먼저 시대적 배경. 80일간 세계일주 내기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수에즈운하(1869년), 미 대륙횡단철도(1869년), 인도반도철도(1870년)라는 19세기 후반을 수놓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포그 경이야말로 획기적으로 발달한 교통 인프라를 전면 활용한 얼리어답터였다. 빨간머리 앤이 입양된 곳, 프린스에드워드섬의 면적은 캐나다의 1800분의 1이었지만 감자 생산은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농업지역이었다. 나이가 들어 농장 운영에 힘이 부친 매슈·마릴라 남매가 남자아이를 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노바의 13살 소년 마르코가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행 선박에 올랐던 때는 ‘이탈리아 디아스포라’의 절정기였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50년 동안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난 이탈리아인은 900만 명. 이 중 200만 명이 돈과 땅은 넘치되 일손은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로 몰려갔다. 마르코의 엄마뿐 아니라 여행지 곳곳에서 마르코를 돕는 친절한 이탈리아인들은 이 거대한 이주 물결에 동참한 사람들이었다.

작가들은 이야기 곳곳에 뼈와 가시를 심어놓았다. 안데르센의 (1845년)가 나온 지 43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에서 성냥팔이 소녀를 다시 등장시킨다. 개인적 박애심과 연민을 강조한 안데르센과 달리, 행복한 왕자는 사파이어 눈동자를 뽑아 성냥팔이 소녀에게 준 뒤 자신의 몸을 뒤덮은 금박 도금을 죄다 벗겨내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동화는 정치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묘사한 점은 비슷하지만 (1923년)와 (1912년)의 운명은 엇갈렸다. ‘내 조국, 내 고향’을 위해 말벌과 맞서 싸우는 마야의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정훈도서’ 대접을 받았고, 이후 저자인 발데마르 본젤스는 나치 정권을 옹호하는 글로 오명을 남겼다. 반면 나치는 가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작가 잘텐도 유대인 혈통이다) 금서로 지정해 불태웠다.

(1883년)도 시대에 따라 재각색됐다. 출간 당시엔 ‘진보하는 시대’에 걸맞은 호기심과 진취성, 사회 풍자를 담고 있었으나 이후 무솔리니 정권은 아류작을 만들어 개구쟁이가 파시스트 소년단의 일원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개작했고, 디즈니는 중산층 가정의 도덕률을 아로새겼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나 인간이길 소망하는 나무인형 피노키오는 이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공지능의 은유로 재해석될 참이다. 동화의 미래는 여전히 ‘오픈 텍스트’다.

이주현 문화부 기자 edigna@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