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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옮겨온 구글번역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40개 언어 통역해주는 무선이어폰 ‘픽셀버즈’ 등장
등록 2017-10-31 08:45 수정 2020-05-02 19:28
구글스토어 갈무리

구글스토어 갈무리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에는 거머리만 한 물고기가 나온다. ‘바벨피시’란 이름의 이 물고기는 동물에게서 나오는 뇌파를 먹고 산다. 인간 귓속에 들어온 바벨피시는 뇌파를 먹고 대신 “두뇌의 언어 영역에서 포착한 의식적 사고 주파수와 신경계 신호를 혼합해 만든 텔레파시 세포간질을 배설한다”. 인간은 이 배설물로 세상의 모든 언어를 즉시 해독할 수 있다.

하지만 공상과학(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언어 해독은 그다지 폼 나는 과학적 상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체가 순간이동하고 축지법처럼 시공간을 접어 날아가는 ‘워프우주선’이 등장하는 마당에, 주머니에서 외계언어 통역기계를 꺼내는 설정은 좀 쑥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지휘봉 모양의 만능통역기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그나마 솔직했던 장면이다. 입에 달고 사는 언어쯤이야 언제든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많이 왔지만 온 길의 몇 배를 더 가야 할지 모른다. 언어는 아직 멀었다”는 인공지능 ‘딥러닝’의 최고 권위자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수의 고백처럼 언어는 만만한 정복 대상이 아니었다.

10월4일 구글이 ‘픽셀버즈’(사진)란 무선이어폰을 선보이자 시끌벅적해졌다. 영어를 쓰는 시연자는 오른쪽 이어폰 단추를 누르며 스웨덴 말을 쓰는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실시간 통역 현장을 본 언론들은 ‘귀에 들어온 상상 속의 바벨피시’ ‘드디어 시작된 동시통역 시대’ 같은 제목을 쏟아내며 이 작은 ‘영웅’의 등장을 반겼다. 이 제품은 한국어, 중국어, 독일어 등 모두 40개 언어를 지원한다. 짝지으면 통역 가짓수가 1600개에 이른다.

통역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애플리케이션(앱)과 인터넷 사이트로 이용할 수 있는 ‘구글번역’ 수준으로 생각하면 된다. 아직 픽셀버즈 자체에 통역 기능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구글 스마트폰(픽셀2)과 블루투스로 연결된 상태에서 구글번역 엔진을 이용한다. 구글번역은 일상적으로 쓰는 짧은 문장은 음성으로 거의 완벽하게 알아듣고 수십 개의 외국어로 제대로 통역해준다.

시구는 어떨까?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같은 문장도 거의 제대로 옮겨준다(한번 해보시라). 1~2년 전만 해도 이런 낯선 문장은 음성 인식 단계부터 엉망이었다. 번역 엔진의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신경망 기반 기계번역’(Neural Machine Translation)의 학습 능력 덕분이다. 새 무기를 장착한 구글번역 엔진은 지금도 전세계 언어의 ‘위키피디아’와 웹사이트의 문장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성장하고 있다. 구글은 이 방식으로 지난해만 기존 통계 기반 번역 방식의 오류를 절반 이상 줄였고, 영어와 가까운 언어는 최대 85%까지 줄였다고 한다.

그럼 이제 결승점에 가까이 온 것일까? “기계번역 얘기가 나오면 등장하는 ‘볼링공 문제’란 게 있다. 인간은 ‘탁자 위에 유리잔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깨졌다’와 ‘탁자 위에 볼링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깨졌다’에서 무엇이 깨졌는지를 간단히 구분할 수 있다. 이건 언어학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어떻게 구성돼 있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것이다.”(구글 피터 노빅 개발이사)

진화 속도로 볼 때 머잖아 기계는 세상의 작동 원리까지 이해하고 인간 언어를 제대로 소리내어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인간은 언어에 도전해 장벽을 깨고 있지만, 기계는 언어를 얻어 인간에 도전하고 있다. 교만해진 기계에 인간은 ‘바벨탑의 형벌’을 고민할지 모른다.

함석진 넥스트인스티튜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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