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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투병 중인 드러머 팻 토피 함께한

하드록밴드 ‘미스터빅’ 내한 공연의 뜨거움
등록 2017-10-25 19:57 수정 2020-05-02 19:28
미국 하드록 밴드 미스터빅의 다섯 번째 내한 공연이 10월8일 서울 광장동에서 열렸다. 이번 공연에서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드러머 팻 토피가 함께해 뜨거운 떼창, 환호, 박수를 받았다. 파파스 이엔앰 제공

미국 하드록 밴드 미스터빅의 다섯 번째 내한 공연이 10월8일 서울 광장동에서 열렸다. 이번 공연에서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드러머 팻 토피가 함께해 뜨거운 떼창, 환호, 박수를 받았다. 파파스 이엔앰 제공

미국 하드록 밴드 미스터빅(MR. BIG)의 드러머 팻 토피가 무대 중앙 드럼 세트로 올라선 순간, 1500여 관객은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드러머가 단지 드럼 앞에 앉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했을까?

고등학교 시절 무척 좋아했지만, 언젠가부터 잊어버린 밴드 미스터빅. 1989년 데뷔한 이들은 내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해체(2002년)했고, 이후 팬들의 요청으로 재결성(2009년)했다. 미스터빅에 다시 관심 두기 시작한 건 2014년. 내한 공연을 앞두고 드러머 팻 토피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다. 자신을 덮친 뜻하지 않은 병에도 그는 공연에 참여한다고 했다. 무조건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 그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3년 만에 찾아왔다. 미스터빅이 10월8일 서울 광장동 예스24 라이브홀에서 다섯 번째 내한 공연을 펼친 것이다. 파킨슨병으로 몸이 불편한 팻 토피가 이번에도 온다는 얘기를 듣고 만사 제치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팻 토피가 두드리던 드럼의 울림

공연 시작 때 팻 토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에 대신 앉은 이는 객원 드러머 맷 스타였다. 그렇게 몇 곡을 연주한 뒤 베이시스트 빌리 시언이 말했다. “우리 잊은 게 하나 있지 않나요?” 그 순간 팻 토피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관객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그를 맞았다. 이후 팻 토피는 메인 드럼 옆에 마련된 작은 드럼 세트 앞에 서서 탬버린을 치며 코러스를 했다. 간혹 스틱으로 드럼을 두드리기도 했다. 힘겨운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큰 울림을 자아내는 듯했다.

‘저렇게라도 함께하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던 중,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팻 토피가 갑자기 메인 드러머 자리로 올라간 것이다. 기대 못한 장면에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 곡은 (Just Take My Heart). 1991년 발표한 2집 (Lean Into It)에 수록된 아름다운 발라드다. 팻 토피는 느리지만 간결하고 정확하게 드럼을 쳤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을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지고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연주를 마친 팻 토피는 일어서서 손을 번쩍 들었다.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다시 아래의 작은 드럼 세트로 내려왔다. 그리고 공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밴드에서 드러머의 자리는 보통 맨 뒤다. 보컬리스트와 기타리스트가 무대 맨 앞에서 관객을 마주하는 동안 드러머는 뒤에서 묵묵히 중심을 잡는다. 드럼이 정확한 템포를 잡지 못하고 빨라지거나 느려지면 밴드 연주 전체가 흔들린다. 야구로 치면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안방마님’ 포수와 같은 존재다. 이토록 중요한 존재임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드러머는 그리 많지 않다. 스포트라이트는 보통 보컬리스트와 기타리스트의 몫이다. 이 때문에 드러머가 자주 바뀌거나 객원 멤버를 쓰는 밴드도 적지 않다.

나는 밴드를 평가할 때 멤버들이 얼마나 끈끈한 관계를 맺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실력을 떠나 멤버들 간의 합이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원년 멤버들이 함께하는 밴드를 보면 무척 반갑고 짠하다. 밴드를 하다보면 별의별 일을 겪기 마련일 텐데, 함께 지지고 볶으며 그 모든 걸 견뎌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다.

이번 미스터빅의 공연을 보며 떠올린 또 다른 밴드가 있다. 영국 록밴드 데프레퍼드다. 1980년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들은 1983년 3집 앨범이 크게 히트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84년 일이 터졌다. 드러머 릭 앨런이 운전하던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만, 그는 왼팔을 잃었다. 드러머에게 한 팔을 잃은 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을 터.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절망하던 그에게 밴드 멤버들은 말했다. “팔 하나쯤 없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굴지 마. 너에겐 아직 오른팔이 있잖아.” 퇴원한 릭 앨런은 멤버들 앞에 섰다. “너희가 기회를 준다면 남은 한 팔로 도전해보고 싶어.”

왼팔 잃은 멤버 위해 ‘특수 드럼’ 주문

멤버들은 한 팔로 칠 수 있는 특수 드럼 세트를 주문 제작했다. 발로 밟는 페달을 많이 만들어 왼손의 공백을 채우려 했다. 릭 앨런은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두 팔로 드럼 치던 시절에 만들어둔 곡들은 소용이 없었다. 모든 걸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1987년 데프레퍼드는 4년 만의 새 앨범인 4집 (Hysteria)를 발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앨범은 1500만 장 넘게 팔려나갔고, 영국과 미국의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한 건 물론, 무려 7곡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렸다. 이 앨범은 데프레퍼드의 대표작이 됐다. 릭 앨런은 지금도 데프레퍼드의 드러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멋진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드러머 때문에 해체해버린 전설의 밴드도 있다. 영국 록밴드 레드제플린이다. 1968년 데뷔 이후 9장의 앨범을 내리 성공시키며 세계 록 역사를 새로 써가던 레드제플린은 1980년 갑자기 해체해버렸다. 드러머 존 보넘이 술을 마시고 돌연 숨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플랜트(보컬), 지미 페이지(기타), 존 폴 존스(베이스)는 “존 보넘이 없는 밴드는 더 이상 레드제플린이 아니다”라며 밴드를 해체했다. 그러고는 각자 활동했다. 이후 여러 음반사와 공연기획사, 팬들이 30년 넘게 재결합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딱 한 번 뭉친 적이 있다. 2007년 12월10일 영국 런던 오투(O2)아레나에서 레드제플린 1집을 낸 애틀랜틱레코드의 설립자 아흐메트 에르테군 추모공연이 열렸는데, 이 무대에 선 것이다. 존 보넘의 자리를 채운 이는 아들인 제이슨 보넘이었다. 이날 공연 이후 넷이서 계속 함께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재결합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우리가 한때 전성기를 보낸 건 분명하지만, 지금은 그 시절이 끝났다”고 잘라 말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전설은 전설로 남겨두는 게 더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반쪽 귀환 기다리는 ‘봄여름가을겨울’

문득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 전태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몇 년째 암 투병 중이다. 김종진은 홀로 밴드를 지키며 반쪽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전태관의 쾌유를 바라고 이 세상 모든 드러머를 응원하며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를 들어야겠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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