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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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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시선강간 없는 ‘안전 뮤페’로!

2030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보라X뮤직페스티벌’ 10월8일 여의도에서 열려
등록 2017-09-19 08:17 수정 2020-05-02 19:28
‘시선강간 없는 안전한 뮤직페스티벌’을 위해 ‘주경야페’의 삶을 사는 페스티벌 기획단. 왼쪽부터 채은, 라꾸, 주연. 김진수 기자

‘시선강간 없는 안전한 뮤직페스티벌’을 위해 ‘주경야페’의 삶을 사는 페스티벌 기획단. 왼쪽부터 채은, 라꾸, 주연. 김진수 기자

9월13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을지로2가 ㅌ카페. ‘음악하는 여자들과 즐기는 여자들의 축제’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였다. 라꾸, 리페, 주연, 채은.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이들은 10월8일 여의도 물빛 무대에서 열릴 ‘보라X뮤직페스티벌’ 기획단이다. ‘보라X뮤직페스티벌’은 ‘안전 뮤페’(안전한 뮤직페스티벌)를 지향한다. ‘시선강간’은 입장할 수 없다. 이를 위해 고안한 방법은 여자들‘만’ 입장하는 축제다. 페스티벌 스태프 전원이 여성공간에서 발생했던 성폭력 사례를 공유하고, 성폭력 발생시 대응 매뉴얼도 숙지할 예정이다. 라인업도 ‘여성혐오/차별’ 없는 음악을 하는 여성 뮤지션으로 꾸렸다. 오지은, 시와, 최삼, 슬릭, AFUZZ 등 홍대신·힙합신 등 각자의 영역에서 고정 팬덤을 확보한 뮤지션들이 모인다.

“서로의 얼굴과 존재 확인할 수 있는 곳”
‘보라X뮤직페스티벌’ 메인 포스터. 여성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이 헤드라이너로 참가한다.

‘보라X뮤직페스티벌’ 메인 포스터. 여성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이 헤드라이너로 참가한다.

“성추행·몰카·시선강간 걱정 없이 안전한 페스티벌.”(주연) “적어도 뮤지션들이 무대에서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는 페스티벌.”(리페) “뭐 입고 가야 하나,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곳.”(채은) “서로의 얼굴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라꾸) 이들이 생각하는 ‘보라X뮤직페스티벌’의 성격이다. 넷을 포함한 20여 명의 페스티벌 기획단은 낮에는 직장·학교 등에서 일하거나 공부하고, 퇴근 뒤 거의 매일 새벽까지 페스티벌 준비를 위한 회의·실무작업을 한다. ‘주경야페’(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X페스티벌 준비한다)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이용한 모금, 티켓 판매 외에 자금 창구를 어떻게 마련할지 몰라 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걱정과 노동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즐겁단다. 이들이 기획한 ‘보라X뮤직페스티벌’은 어떤 축제일까. 이들은 왜 이런 축제를 기획한 걸까.

최근 2~3년 사이 뮤직페스티벌에서 성추행 문제가 끊이지 않고 제기돼왔다. 지난해 인천 펜타포트록페스티벌 때 여성 관객들이 페스티벌 도중 남성들의 강제 성추행, 화장실 몰래카메라(몰카) 촬영 등을 고발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을 잇따라 쏟아냈다. 결국 페스티벌 주최 쪽은 자신들의 미진한 대응을 사과했다. 올여름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때도 성추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예술실천단체 ‘페미광선’은 뮤직페스티벌 내 성폭력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기획단 구성원들 역시 음악을 즐기러 뮤직페스티벌에 갔다가 여러 폭력을 경험했다. 라꾸는 아이슬란드 뮤지션 콘서트에서 폭력적 상황을 겪었다.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당시 뮤지션의 이름도 잊었다. “스탠딩 공연이었는데 술 취한 남성이 밀치면서 앞으로 나와 넘어질 뻔했다. ‘조심하라’고 항의했더니 나를 때릴 듯이 노려보며 옆으로 거칠게 밀고 갔다. 내가 정말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가 너무 컸다.” 라꾸는 그 뒤로 친구들이 ‘뮤페 가자’고 하면 “음악은 ‘멜론’(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이지”라고 대꾸한다. 나쁜 첫 경험 탓에 ‘뮤페’를 멀리했던 라꾸는 이번에 블로그를 통해 페스티벌을 배우느라 고생한다.

성중립 화장실과 아이돌봄 공간도

시선강간도 다반사다. ‘노브라’를 지향하는 채은은 “더운 여름이어서 민소매를 입었다. 옆자리 남성이 브라를 했는지 안 했는지 계속 쳐다봤다. 앞으로 이런 옷은 입지 말아야겠다고 자기 검열하게 됐다”고 말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채은의 친구는 평소 좋아하는 깊은 V넥 민소매의 ‘V’ 부분을 꿰매 입고 페스티벌에 간다.

서울 홍익대 앞 인디공연에서 ‘찍덕’(공연 등에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는 리페는 ‘무개념 뮤지션’들의 여성혐오 발언이 지긋지긋하다. “다른 관객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잘 찍으려면 앞자리가 좋다. 그래서 미리 가 있는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보다 앞 순위에 있는 뮤지션들이 ‘오늘 관객 물이 좋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 ‘멘트하지 말고 노래나 해’ 말하고 싶다.” 리페는 여성팬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루피’(뮤지션과 섹스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는 사람)로 취급하는 시선·발언 때문에 홍대를 떠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이런 차별적 시선, 성폭력, 성추행, 몰카 등에서 자유로운 페스티벌을 해볼까. ‘여자만의 축제’의 출발이다. 이때의 여자는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 ‘남성/여성’으로 구분한 개념은 아니다. ‘장애/성적지향/자녀유무에 관계없이 자발적/강제적 여성으로 살았거나 살고 있는 누구나’가 이들이 생각하는 ‘참가 자격’이다. 이 때문에 기획단은 공연 전체를 장애인이 심리적·물리적 장벽을 느끼지 않도록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으로 설계하고 있다. 경사로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고 청각장애인도 공연을 즐길 수 있게 자막 있는 스크린을 설치하거나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시선 장벽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성중립 화장실’도 설치한다. 아이 때문에 뮤직페스티벌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아이돌봄’ 공간도 마련한다.

그러나 ‘자격’이란 말은 늘 여러 문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즐기기 위한 축제에 ‘젠더에 따른 자격 조건’을 두는 건 또 다른 배제와 차별이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만약 ‘시스젠더 남성’(신체적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남성)이 축제의 취지에 동의해 참가를 원할 경우 ‘안 됩니다’ 해야 할까.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자신의 젠더를 운영진에게 어떻게 확인시킬 수 있을까. 자신의 젠더를 남성/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거나, 정체화할 수 없는 ‘논바이너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여성’은 무엇이고 ‘여성’은 어디까지일까.

폭력 없는 공간 상상하고 기획하고

애초 기획단은 티켓 구매시 주민등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법적 성별’이 여성이 아닌 경우 티켓을 살 때 ‘저는 법적 성별은 남성이며, 여성 or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고정된 특정 성별을 한 사람에게 강제하고 성적 정체성을 공개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지적에 기획단은 과 인터뷰하는 날에도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고, 다음날에도 회의를 이어갔다. 기획단은 9월15일 ‘법적 성별이 여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만 요구된 서식이 얼마나 차별적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기획단의 부족함과 차별적 관점 때문이다. 저희의 조치로 받으셨을 모욕감과 상처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SNS 등에 올렸다. 기획단은 티켓 구매시 요구하던 서식을 삭제하고 관객 모두 ‘반차별 비폭력 서약서’에 서명한 뒤 입장하는 방식으로 절차를 바꿨다.

‘보라X뮤직페스티벌’은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차별은 실재하며 이것을 생존 문제로 각성한 2030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몸짓이다. 서울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여성들은 지난 2월 ‘2030 페미캠프’를 꾸렸다. 페미캠프에서 ‘여자들의 뮤직페스티벌’ 아이디어가 나왔다. 나쁜페미니스트, 불꽃페미액션, 초등성평등연구소 등 공동주최 단체들도 대개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생겼다. 기획단은 “모든 사회 공간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는 안전한 공간이기 위해, 그런 공간을 상상하고 기획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며 ‘보라X뮤직페스티벌이 그 상상과 기획을 위한 실험적 공간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빠른 예매 중요해요”
페스티벌 기획단이 페스티벌 준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굿즈들.

페스티벌 기획단이 페스티벌 준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굿즈들.

기획단이 꿈꾸는 ‘보라X뮤직페스티벌’은 어떤 모습일까. 채은은 강남역 시위 현장 등에서 “시위 현장 말고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만나자고 말했는데 10월8일이 되면 그 바람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주연은 “나는 남성, 나는 여성 그렇게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이 축제가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젠더’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리페는 “보라X뮤직페스티벌을 통해 여성 뮤지션들의 무대를 넓혀주고” 싶단다.

추석이라는 ‘민족 명절’이 끝나면 가부장제하의 언어·시선 폭력으로 다크서클 길이가 한 뼘은 늘어날 게 뻔하다. 그렇다면 10월8일 서울 여의도로 나가 ‘소리 질러!’보면 어떨까.

뮤직페스티벌은 해방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수지타산을 맞춰야 하는 엄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성찰하는 기획단이 마지막으로 귀띔했다. “빠른 예매 중요해요, 텀블벅 굿즈를 사주시면 좋겠어요. 저희의 한숨을 덜어주니까요.” (웃음)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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