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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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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고대부터 현재까지 약의 ‘두 얼굴’ 다룬 <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
등록 2017-08-16 13:47 수정 2020-05-02 19:28

긴 호흡기줄을 코에 단 14살 소년이 말했다. “꿈이 없어요.” 소년의 대답에 어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생후 14개월 때부터 산소통은 성준이에겐 생명줄이었다. 성준이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다.

가습기 살균제와 ‘판박이’ 사건이 불과 반세기 전 외국에서도 있었다. 독일 제약회사 그뤼넨탈이 개발한 수면제 탈리도마이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린 사람들이 의사의 처방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약이었다. 전세계 46개국에서 아스피린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팔렸다. 입덧에 효과 있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연구 발표 이후엔 임신부들 사이에서도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이 약은 태아에 치명적이었다.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5년간 전세계 신생아 1만2천 명이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기형 상태로 태어났다. 건강과 위생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약이, 독으로 돌아온 비극적 사례였다.

의약품, 비타민, 중금속 등의 효능과 안전성을 연구해온 세계적인 독성학자 정진호 서울대 교수가 (푸른숲 펴냄)를 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책은 약과 독의 양면성을 다룬다. ‘약의 두 얼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아편이다. 고대 수메르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식물’이던 아편은 기원전부터 강력한 통증치료제 또는 수면유도제로 쓰였다. 하지만 쾌락 중독성이 컸다. 이 약 때문에 청나라는 영국과 전쟁까지 벌였다. 아편 추출물로 만든 헤로인 역시 진통제로 널리 사용됐지만 환각, 호흡곤란, 구토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책은 아편·탈리도마이드·가습기살균제처럼 생명을 위협한 약부터, 마취제·백신·소독제 등 인류를 구한 약, 그리고 남성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해피드러그’ 비아그라까지 약학사의 결정적 장면을 흥미롭게 다룬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질병과 싸우며 고군분투한 인간의 열망을 과학적 시각으로 풀되, 어떤 약의 효능이 좋다고 권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약 의존도 줄이기, 의료기록 보관하기 등 건강하게 사는 법을 소개한다.

1부 ‘약의 오해와 진실’, 2부 ‘약은 어떻게 독이 되는가’가 가장 흥미롭다. “종합비타민제는 균형 잡힌 식사를 대체할 수 없다.” “숙취해소제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 유일한 방법은 과음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디톡스 제품으로 제거할 수 있는 독은 없다. …부작용만 생길 수 있다.” 종합비타민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챙겨 먹은 사람일수록, 음주 뒤 입안에 털어넣은 숙취해소제의 양이 많을수록, 디톡스 제품의 믿음이 큰 사람일수록 뒤통수 아플 얘기가 많이 담겼다.

독약. 모순적인 단어다. 사람을 죽이는 ‘독’과 살리는 ‘약’이 한 단어 속에 공존한다. 약은 때로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약이 ‘약’으로만 쓰이려면 기업·정부뿐 아니라 소비자의 역할도 필요하다. 책이 권하듯, 약봉투 겉면에서 복용량과 성분을 꼼꼼히 따지고 질병관리본부 사이트와 친해진다면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약을 선택할 것”라는 지은이의 기대는 반쯤 채워진 것이다.

장수경 편집3팀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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