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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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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피하지 마

행복의 뿌리는 ‘나’, 누구도 대신 키워주지 않아

저 머나먼 땅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 기회가 있다
등록 2017-08-09 12:56 수정 2020-05-02 19: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세상에, 이런 행복알레르기 환자 같으니라고! 행복이 무슨 끔찍한 바이러스라도 되는 거예요? 이제 행복을 있는 그대로, 행복 자체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이십 년 넘도록 심각한 일중독 상태로 살아온 M선배에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었다. 이제 제발 좀 그냥 행복해지면 안 되겠냐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 안 되겠냐고. 선배는 열아홉 살에 온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고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선배는 ‘돈 버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힘들어하거나 고생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독서광이었고, 클래식 음악 마니아였으며,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만 걸쳐도 맵시가 났다. 고생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해맑은 얼굴 때문에 나는 그를 ‘부르주아의 아들’로 착각하기도 했다.

일중독자 M선배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미혼이고, 회사에서 충분히 인정받으며, 야간 대학원까지 다녀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늘 혼자 명절과 크리스마스를 맞아왔을 테고, 주말마다 혼자 끼니를 챙겨야 할 선배의 오랜 외로움이 안타까워 나는 실로 오랜만에 소개팅 주선자가 되었다. 내 주변의 미혼여성 중 불현듯 J가 떠올랐다. J는 정말 행복바이러스를 몰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발랄하면서 지적이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듬직했다. M과 J,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두 사람이 지금까지 서로 전혀 모르고 살아가다 어느 날 갑자기 운명적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내 마음까지 설레기 시작했다.

소개팅 느낌이 살짝 스며들어 있지만 심각한 소개팅은 아닌,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유도하기 위해 나는 무던히 애썼다.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이제 내가 슬쩍 빠져줘야 할까’ 생각할 정도로 흥미로운 대화와 호감 어린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의 흥겨운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기대감에 가득 차서. “어땠어요?” 선배는 쓸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훌륭하지. 정말 좋은 분이야, 모든 면에서. 그런데 나이 차이가 많아. 내 나이가 너무 많잖아.” 맥이 탁 풀렸다. “그게 진짜 이유예요? J씨는 나이 차이 같은 건 아무렇지 않게 극복할 사람이에요. 나이에 대한 편견도 없고 생각도 얼마나 깊은데요.” 선배는 완강했다. “본인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J씨의 부모님이 계시잖아. 그분들은 내 나이가 얼마나 부담스러우시겠니. 그분들께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이성적으로는 선배를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고려하면 과연 자신의 진짜 감정에 충실할 수 있을까. 그는 눈앞의 행복 가능성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행복해질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형편이 되면’ 행복을 누릴 거라 생각하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많이 놓친 것은 아닐까.

행복알레르기

삼십 대까지는 잘 안 보이던 그 사람의 ‘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자존심은 너무 꼿꼿해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예컨대 얼마든지 내가 술을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후배에겐 절대 얻어먹지 않겠다’는 해묵은 원칙을 앞세워 이미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낸 나를 여러 번 주저앉혔다. 나는 선배의 지나친 꼿꼿함이 못내 가슴 아팠다. 열아홉 살 때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족을 이끌어온 사람이니 그가 견뎌온 외로움과 부담감의 무게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매우 친한 선후배 사이였지만, 그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다정하고 유쾌하며 총명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그의 자존심과 나의 두려움이라는 벽. 선배는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지만, 선배이자 연장자라는 벽,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존재여야 한다는 책임감, 자기 안의 가장 쓰라린 고독과 슬픔은 결코 들키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 또한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가 되니, 그 보이지 않는 벽을 살짝 건드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도 이제 사십 대니까 더 이상 ‘한참 어린 후배’로만 보이지 않겠구나. 말로 하기 조금 쑥스러운 내용이라 문자메시지로 내 마음을 적어 보냈다.

“이제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요. 내가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관찰해왔는데, 선배는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잖아요. 그것도 아주 차고 넘치도록. 이제 마음 놓고 미친 듯이 행복해져봐요. 이 행복알레르기 환자 같으니라고!” 선배는 내 메시지를 보더니 스마일 이모티콘을 담아 답장했다. “그래, 고맙다! 난 원래 행복한 것들이 싫었어!^^ 이제 안 그러도록 노력해보마.” 어쩌면 나와 별 공통점이 없는 M선배에게 그토록 친밀감을 느낀 이유가 나 또한 그처럼 행복알레르기 환자였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알레르기는 마치 DNA의 유전처럼 삭제하거나 고칠 수 없는 무엇으로 보였다. 누구에게 절대로 신세 지기 싫어하는 마음, 행복한 순간이 올 때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불편하고 어색해하는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세 지기를 거부한다고 전혀 신세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니다. 내 지나친 자존심 때문에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끼친 마음의 불편도 또 하나의 신세다. 삶이란 끊임없이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신세를 지고, 나 또한 나에게 기대는 사람을 기꺼이 얼싸안는, 영원한 신세 지기의 주고받음이다. 평생 찾아헤맸지만 막상 맞닥뜨린 행복의 빛나는 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도망치고 싶은 마음, 눈앞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누릴 줄 모르는 마음,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친밀감보다 거리감부터 느끼는 마음. 너무 익숙한 마음이라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마음을 그대로 지닌 채 하루하루 나이 들기가 무서워졌다. 행복이 무슨 바이러스도 아닌데 왜 행복 앞에서는 낯선 괴물을 만난 듯 멈칫하게 되는지. 왜 행복한 사람들 앞에서는 낯선 외계인을 만난 듯 움찔하는지. 마흔의 문턱을 넘으려니 그동안 스스로 채워온 그 끈질긴 마음의 족쇄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졌다.

‘욜로’와 ‘휘게’는 이미 내 곁에

이제 행복의 기회가 외부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보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성취나 경쟁을 통한 짜릿한 승리감보다 마음을 한껏 이완해 얻는 소소한 기쁨이나 저강도의 쾌락이 나에게 맞는 행복레시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나를 위한 깜짝 선물로 일주일간 제주도 여행을 선택했다. 먼 나라로 떠나려면 준비할 것이 많고 긴장되기 때문에 아무리 가고 또 가도 질리지 않는 내 마음의 보물섬, 제주도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멋진 제주도에서 일과 책임, 고민거리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잘 안 된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삶의 태도)와 휘게(Hygge·물질적 쾌락보다 마음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는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니구나 뼈저리게 깨달았다. 스케줄을 비울 수는 있어도 마음을 비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뭔가 내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쥐어짜야 한다’는 강박,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와 속수무책의 그리움 같은 것들 때문이다. 무려 일주일이나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냈는데도 극심한 불안과 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결코 보내지 못할 글을 계속 썼다 지우고, 썼다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욜로와 휘게’는커녕 행복의 ‘ㅎ’도 느끼지 못한 채 허망하게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의 비결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늦은 밤 갑자기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어 동네 편의점에 들렀다. 시원한 커피를 손에 쥐니 문득 산책하고 싶었다. 비 온 뒤의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 비를 맞아 풀잎 냄새를 더욱 진하게 뿜어내는 나무들의 싱그러운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다.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나뭇잎이 가로등 불빛까지 한껏 품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저 나무인데, 그저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인데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단 한 번뿐인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이곳, 이 시간, 이 마음, 이 기분으로 봐야만 보이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오늘 이 시간 아니면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아름다움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휴대전화가 없었다. 왜 하필 전화기를 안 가지고 나왔을 때 이렇게 아름다운 걸 발견할까. 하지만 전화기로는 이 마음까지 담을 수 없겠구나, 오늘은 그저 눈에만 마음에만 이 풍경을 담뿍 넣어두자. 세상 바깥에서 그토록 찾아헤매던 것을 우리 집 바로 옆에서 발견하다니. 돌이켜보니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힘드네. 이번 학기가 최악의 학기야’라는 생각을 매 학기 해왔다. 지난 학기에도, 지지난 학기에도 ‘이번 학기는 유독 길고 긴 터널 같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마음을 내가 진심으로 보듬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질책하고 힐난하고 무시했다. 내 마음인데, 내 슬픔인데 내가 짓밟은 것이다. 불행하다는 감정의 원인을 제공할 만한 자극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행복하다는 감정의 원인을 제공할 만한 자극도 도처에 널려 있다. 문제는 행복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나 자신, 행복 앞에서 오히려 뒷걸음치는 우리 자신의 망설임이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의 조용한 합창을 듣는 것만으로도 천상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나 자신, 그것이야말로 내가 더 늦기 전에 반드시 붙들어야 할 ‘최고의 나’였다.

결단하고 선택하라

나는 세계를 통치하거나 분석하거나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찬탄을 보내며 그 꾸밈없는 세계에서 최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깨달은 최고의 행복레시피다. 행복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선택에서 온다. 행복은 어떤 일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인 결단에서 우러나온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행복은 당신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누구나 그 씨앗은 분명 지니고 있지만 올곧은 아름드리 한 그루로 키워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희귀한 마음의 나무다. 씨앗은 동일하지만, 그 나무의 품새와 열매의 향기는 저마다 다른 나무. 행복은 당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당신으로부터 매일매일 빚어지는 것,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나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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