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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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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 그녀들의 미스터리

여름휴가 떠나는 당신에게 권하는 여성 작가의 미스터리 소설 6권
등록 2017-07-30 02:39 수정 2020-05-02 19:28
여름이다. 그리고 여름휴가다. 무더위와 함께 찾아온 쉼의 시간.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보며 휴가를 보내고 싶다면, 여름을 서늘하게 해줄 오싹한 미스터리 소설을 권한다. 그중에서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고, 쫄깃한 긴장감과 반전을 선사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추천한다. 박현주 추리작가, 이다혜 북 칼럼니스트,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최고운 황금가지 출판사 편집자가 ‘추리의 눈’으로 고르고 고른 작품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묻히기엔 아까운 작품을 뽑았다. 한여름 밤에 어울릴 만한 그녀들의 미스터리를 소개한다. _편집자
2016년 7월 문을 연 추리소설 책방 ‘미스터리 유니온’은 추리소설 마니아 사이에 이미 입소문 난 곳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추리소설 1600여 권이 진열 돼 있다.

2016년 7월 문을 연 추리소설 책방 ‘미스터리 유니온’은 추리소설 마니아 사이에 이미 입소문 난 곳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추리소설 1600여 권이 진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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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기차역 뒷골목에 위치한 추리소설 책방 ‘미스터리 유니온’. 7평 남짓한 공간에 세계 각국의 추리소설 16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이곳은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핫플레이스다. 유명 작가의 작품만 꽂힌 대형서점과 달리 미술·법정·의학 추리소설 등 다양한 전문 미스터리물을 볼 수 있다.

2016년 7월 미스터리 유니온 책방을 연 유수영 대표는 “누구에게나 추리소설 관련 추억이 하나쯤 있다. 그 추억을 찾거나 추리소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이 책방의 고객 연령층은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데 그중 가장 많이 찾아오는 이들은 30대 여성이란다.

유 대표도 추리소설 마니아다. “추리소설은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소설’이라 생각하면 된다. 어떤 책은 복잡한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을 주고 어떤 책은 추리 재미는 물론 미술사 논문을 하나 본 것처럼 많은 지식을 전한다.”

인기 있는 여성 작가의 ‘가정 스릴러’

여름철을 맞아 출판시장에 다양한 미스터리물이 쏟아지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 B. A. 패리스의 , 대프니 듀 모리에의 , 박현주의 , 시모쓰키 아오이의 등이다. 그중에서 여성 작가들의 심리 스럴러가 인기다. 장르문학 전문출판사 황금가지의 최고운 편집자는 “예전에 남성 작가들의 선 굵은 작품, 예를 들어 역사 미스터리가 주류를 차지했다면 최근엔 여성 작가들의 가정사를 다룬 섬세한 미스터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 2012년 출간된 길리언 플린의 베스트셀러 가 이런 흐름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심리 스릴러로 분류되는 등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이나 가족제도에 내재한 비밀을 다룬다는 이유로 ‘가정 스릴러’(Domestic Thriller)라고도 불린다. 여성 독자를 주된 대상으로 해 ‘칙누아르’(Chick Noir)란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칙누아르는 여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결혼’과 ‘일’이라는 여성의 중요한 화두를 다루는 소설 (Chick Lit)에서 파생된 용어다. 거기에 영화 장르에서 많이 사용되는 ‘누아르’를 결합해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범죄소설을 통칭한다.

더 이상 사적일 수 없는 것

이다혜 북 칼럼니스트는 책 에서 “지금의 미스터리 트렌드는 거대한 악이 아니라 현실적 악을 다룬다”고 했다. 온라인 매체 살롱닷컴에 실린 로라 밀러의 글 ‘왜 오늘날 재미있는 범죄소설가들은 여성인가’를 인용해 “여성 작가들의 범죄소설은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소설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위험한 영역인 ‘가족·결혼·우정’을 다룬다”고 지적했다.

현대 가정 스릴러는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박현주 추리작가는 “결혼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며, 이후에 영원한 행복 같은 결말은 없다. 결혼은 하든 말든 여성에게 언제까지나 문제로 남는다”고 말했다.

결혼과 가족제도 안에서 여성이 겪는 아픔은 가정스릴러의 중요한 소재다. 김용언 편집장은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지 에 실린 ‘가정 스릴러에 따라 붙는 몇 가지 주석’이라는 글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이 더 이상 사적일 수 없다는 것,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던 사랑이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허위로 가득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의 선명한 공포와 불안”이 가정 스릴러를 꿰뚫는 공통된 심리라고 표현했다.

공포와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모습은 과거 추리소설과 많이 다르다.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폭력의 일방적인 희생자이거나 가련하고 불쌍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여성이 쓰고 여성이 주인공’인 가정 스릴러에서 여성은 단편적 인물이 아니다. 이들 작품은 주인공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고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은 존재로 빚어낸다. 가정이나 자기 삶을 지키려는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그리는 것이다.

미스터리 속 ‘허스토리’를

미스터리 범죄소설은 그 작품이 생산되는 시대를 반영한다. 최근 가정 내 폭력과 데이트 폭력 같은 범죄가 예전보다 더 일상적이고 개인화돼 있듯 미스터리 작품 속 범죄도 그러하다. 그 경향을 볼 수 있는 게 바로 가정 스릴러다. 이들 작품에서 여성은 단순한 피해자로 남거나 일방적으로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르는 이에게 복수하거나 사건을 파헤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쓰고 여자가 주인공인 미스터리 소설. 피가 낭자한 호러물보다 더 끔찍하고 은밀하고 위험한 ‘마음 속 공포’를 선사할 것이다. 푹푹 찌는 더위에 잠 못 드는 한여름 밤, 당신이 몰랐던 미스터리 속 ‘허스토리’를 체험해보시라.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클레어 더글러스의


누가 비밀을 감추는가



7월17일 은 여성으로 오인받아도 상관하지 않는 남성 작가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기사 부제는 이렇다. “여성의 시점에서 말하는 심리스릴러가 인기 장르가 되면서, 남성 작가들이 (성별이) 모호한 필명을 찾는다.” 가 처음 발표됐을 때 저자 이름은 본명 샬럿 브론테가 아니라 (남성 작가가 더 나은 비평을 받는 것을 감안해 남성적 이름인) 커러 벨로 표기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이 달라졌구나 싶다. 길리언 플린의 (영화화), 폴라 호킨스의 (영화화), 리안 모리아티의 (드라마화) 같은 히트작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주인공(시점)의 심리스릴러’라는 것이다. 클레어 더글러스의 , B. A. 패리스의 , 알리 랜드의 , 진 한프 코렐리츠의 , 루스 웨어의 등도 6월 이후 출간된 이 장르의 신간이다.

두 여자의 내밀한 기록과 심리묘사

클레어 더글러스의 (정세윤 옮김, 구픽 펴냄)의 원제는 ‘Local Girl Missing’이다. 소설은 동네에서 여자아이가 실종 20년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으로 시작한다.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 6일 동안 벌어지는 사건의 주인공은 실종된 소피의 단짝이던 프랭키다. 소피의 오빠에게 연락받고 프랭키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책은 실종 직전까지 소피가 쓴 일기와 현재 시점의 프랭키의 심리를 번갈아 보여주며 진실을 따라간다. 초반에는 견고해 보이던 두 소녀의 우정이 중반으로 갈수록 분열된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누가 비밀을 감추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서로에게 비밀은 없어 보이던 두 여자의 관계가 내밀한 기록과 심리묘사를 통해 그려진다.
마이클 코넬리의 (영화화), 리 차일드의 (로 영화화), 제프리 디버의 (영화화) 같은 남성 작가가 남성 주인공을 내세워 ‘시리즈’로 히트시킨 작품과 지금 유행하는 여성 작가의 심리스릴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범죄물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남성 작가들의 스릴러가 법·의학·군사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계속 새로운 악당을 상대하는 구성이라면, 여성 작가들의 심리스릴러는 훨씬 더 현실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전자가 저녁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닫힌 현관문 뒤의 이야기다.
가정폭력, 성추행이나 성폭력, 배우자의 외도 같은 이슈가 여성 시점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독특한 심리스릴러를 만들어낸다. 책 제목부터 가정과 현실의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시리즈화가 불가능하다. 주인공들은 맨손으로 사람 죽이는 기술이라고는 프라이팬을 휘두르거나 힘껏 미는 정도가 전부인 일반 여성이다. 주인공이 목격자 위치에서 사건에 점점 깊이 개입해가는 줄거리도 비슷하다. 이 스토리들의 특징은 여성의 증언이 부정당한다는 것이다. 다른 집을 지켜보다가 그 집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알코올중독이나 (수면제를 비롯한) 약물을 복용하고, 우울증 치료를 받거나 받은 전력이 있는 게 그 이유로 제시된다. 여성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구성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반전의 열쇠

그러다보니 일기나 편지, 독백이 중요한 반전의 열쇠가 된다. 이 장르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은 남편이며, 가장 많이 죽는 사람 역시 남편임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단순히 ‘범인 잡기’보다 ‘피해자 구제’에 좀더 무게중심이 기울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심리스릴러는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는 지루함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기존 ‘남성 작가-남성 주인공’ 스릴러처럼 세계를 구해내는 일이라면, 슈퍼히어로가 더 잘하지 않을까. 최소한 올여름까지 심리스릴러의 인기는 뜨거울 것으로 보인다.
이다혜 북 칼럼니스트

주목! 이 미스터리

알리 랜드 지음, 공민희 옮김, 나무의철학 펴냄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 예담 펴냄

진 한프 코렐리츠 지음, 김선형 옮김, 열린책들 펴냄


마쓰이 게사코의


사라진 유녀의 감춰진 얼굴



증언으로서 소문은 생산자보다 그 대상에 초점이 있는 장르다.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을 노리되, 그들의 약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좇는다는 면에서 음험하고 파괴적이다. 소문은 진실을 가장하지만, 거짓을 일정 부분 품고 있어서 늘 모호하다. 소문의 주인공들은 약하고, 파악할 수 없어 신비화되며, 쉽게 잡히지 않는다.
여기 한 여자에 대한 소문과 증언이 있다. 일본 에도시대의 유곽 요시와라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유녀 가쓰라기를 둘러싼 말들이다. 남달리 배짱 두둑하고, 총명하며, 미모와 매력이 출중하고, 마음의 행로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 그러나 사람들이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는 엄청난 소동을 일으킨 여자이기도 하다.

권력적 전복을 품는 공간
마쓰이 게사코의 (박정임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의 기본 구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일견 는 제목이나 구성으로 볼 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유곽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공간이며, 거기서는 계급적 권력으로 타인의 몸과 마음을 사는 것이 허용된다. 이런 곳에 대한 안내서라니, 일종의 풍속 스케치일까 싶어 개운하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가 꼼꼼히 고증해 새롭게 건설한 공간으로서 유곽은 권력적 전복을 품고 있다. 여기에는 남편의 빚과 가족의 가난 때문에 팔려오는 여자가 있고, 순정을 주었으나 여지없이 배반당한 여자가 산다. 그럼에도 그들은 힘을 다해 살아남고, 운명을 향해 반격한다.
이야기는 정체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어떤 청자가 요시와라를 돌며 여러 사람에게서 가쓰라기에 대한 소문과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유곽의 지배인, 시중들던 여자, 게이샤, 손님, 여러 사람이 각각 자신의 목소리로 한 여자의 삶을 구성한다.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결국 모두를 매혹했으나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여자 가쓰라기를 이해하는 데 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유곽에 왔으나 타고난 미모와 오기로 유곽의 대표 유녀가 된 가쓰라기는 누구였을까. 작품 초반에 그녀는 마치 창녀와 여신을 동시에 간직한 듯 신비롭게 그려질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남자가 집요하게 가쓰라기의 발자취를 추적해나가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과 동기가 있는 인간으로서의 옷을 입는다. 남자가 알아낸 것은 가쓰라기가 일으킨 사건의 진실인 동시에, 한 여자의 깊은 의지와 신념이다.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이른바 유녀들의 “첫날밤을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한 주류 도매점 이타미야의 한사이 영감의 회상이다. 그는 어느 시 모임에 갔다가 이전에 알았던 유녀가 모임 주최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떠보기 위해 마츠오 바쇼(에도시대 하이카이 작가)의 “한집에서 새하얀 싸리를 보았었지”라는 시구를 읊는다.

“피를 빨고 우는 가을 모기 성가시구나”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대꾸한다. “피를 빨고 우는 가을 모기 성가시구나.” 이전에 밤을 보냈던 여자가 자신에게 여전히 연연할 거라고 허망한 착각을 하는 남자에게 일침을 놓는 말이다. 한마디로, 힘이 빠진 가을 모기만도 못한 연약한 존재가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우리는 “소문의 여자”에 대한 서사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힘에 지고 사랑에 우는, 남자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여자들. 하지만 여자 또한 존재의 명분을 실현하고, 자기 삶의 동기를 향해 돌진한다는 것을 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보여준다. 독자가 마지막에 만나는 인물은 누구보다 강하고 대의를 위해 삶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던 한 여자다.
박현주 추리작가·서평가

주목! 이 미스터리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

리사 마르클룬드 지음, 한정아 옮김, 황금가지 펴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마시멜로 펴냄


기리노 나쓰오의


우리 삶 ‘아웃’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 중 줄거리나 제목조차 흐릿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 작품이 있다. 그중 하나가 기리노 나쓰오의 (김수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이다. 개인적으로 기억 속 생생한 소설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도시락 공장 야근 파트에는 다양한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남편과 아들이 말문을 닫아버려 집안 분위기가 황폐해진 40대 주부 마사코, 노쇠한 시어머니와 중학생 딸을 혼자 떠맡은 미망인 요시에, 저축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편과 사는 두 아이의 엄마 야요이, 그리고 명품에 빠져들어 카드빚으로 파산 직전에 놓인 구니코 등 네 여성도 이곳에서 일한다. 밤 12시부터 새벽 5시30분까지 일하며 수천 개의 도시락을 만드는 고된 업무이기에 언제나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명탐정도 없고 정의의 사도도 없다
어느 날 야요이는 순간적으로 인내심을 잃고 남편을 살해한다. 그녀는 사건을 수습할 능력이 없어 동료 마사코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마사코는 야요이를 돕기로 결심하고 요시에에게 협력을 부탁하고 갑자기 찾아온 구니코까지 끌어들여 주검을 해체해 처리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는 구니코 탓에 주검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점점 커진다.
은 앞에서 언급한 도입부까지 보면 ‘흔한’ 추리소설로 짐작해버리기 쉽다. 일반적 추리소설의 규범대로 범죄, 즉 살인은 일찌감치 벌어지고 엽기적인 시체 처리 방법으로 흥미를 이어간다. 그러나 범인이 처음부터 드러나고 범행 동기 역시 너무나 단순해 독자에게 궁금함을 남겨주지 않는다. 사소한 일로 인해 예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에서 눈에 띄는 점은 모든 사건이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명탐정도 등장하지 않고, 정의의 사도도 없다. 그녀들의 성격은 본능적이면서 단순하지만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각자 내면적 규칙에 충실하고 가정이 무너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마사코가 아무런 조건 없이 야요이를 돕는 이유도 무척 단순하다. 붕괴된 가족, 그리고 고독을 공유하는 ‘서로 도와야 하는 여성 동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주류층이 아니었던 그녀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무능한 남성을 살해해 ‘아웃’될 위기에 놓이고, 죽음이라는 ‘아웃’ 지역에 점점 다가가게 된다.
은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 수상작이자 미국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 후보에도 올랐던 작품이지만, 일본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회고발 소설로도 볼 수 있다.

가장 암울한 최고의 걸작
1997년 출간된 은 꽤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난 시절 이야기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에 부딪치고 만다. 매일 밤 공장과 집을 오가며 고달프게 일해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틸 정도인 워킹푸어의 현실은 남의 나라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면, 은 가벼운 마음으로 유쾌하고 상큼한 작품을 읽고 싶은 분에게 권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추리소설이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데, 은 그중에서도 가장 암울하다. 최고의 걸작이기도 하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주목! 이 미스터리

P. D. 제임스 지음, 이옥진 옮김, 황금가지 펴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엘릭시르 펴냄

가노 도모코 지음, 박정임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대프니 듀 모리에의


그녀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



편집자로서 조금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작품을 영화, 뮤지컬, 그다음 소설 순서로 접했다. 그래서 소설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현대문학 펴냄) 하면 언제나 스크린 속 조앤 폰테인의 순진하고 몽환적인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다음은 뮤지컬에서 “레베카” 하고 음습하게 속삭이던 코러스가 생각난다.
레베카는 영화, 뮤지컬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변주를 탄생시킨 소설이야말로 진정 인간의 불안과 공포, 광기 같은 심리를 그려내는 재주가 탁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히 ‘서스펜스의 여왕’이란 타이틀에 부끄럽지 않은 솜씨다. (더불어 그녀에게는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이란 별칭도 있지만, 워낙 애거사 크리스티의 광팬인 나로선 이 말만큼은 애써 부정하련다.)
매혹적이고도 불길한 전주곡
저자 대프니 듀 모리에는 배우이자 연출가인 아버지와 배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역시 유명한 풍자만화가였고 언니 또한 작가의 길을 걷는 등 유명한 예술가 집안 출신이다. 그녀가 일찍부터 글솜씨 재능을 꽃피우는 게 당연한 환경이었다.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유려하게 그려내는 글로 익히 잘 알려진 모리에는, 최근 여성 작가들의 스릴러 붐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더없이 섬세한 내면 묘사가 장기인 그녀의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전부터 독자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런 장기가 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특히 소설 도입부에서 펼쳐지는 맨덜리 저택 꿈에 대한 서술은 앞으로 펼쳐질 비극에 대한 매혹적이고도 불길한 전주곡처럼 들린다.
‘나’는 일찌감치 부모를 여의고, 반 호퍼 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돼 함께 몬테카를로에 온다. 그곳에서 맥심 드 윈터라는 잘생기고 부유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상처(喪妻)하고 홀로 지낸다. 나는 맥심의 전부인 레베카가 살아생전 아름답고 화려한 사교계의 꽃으로 유명했다는 것과 맥심이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반 호퍼 부인이 감기로 앓아누운 사이에 나는 맥심과 가까워지고, 반 호퍼 부인이 몬테카를로를 떠나려고 한 것을 계기로 맥심은 내게 청혼한다. 신혼여행을 마친 부부는 영국 전역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드 윈터 집안의 저택, 맨덜리로 오는데…. 신데렐라풍 로맨스를 빙자한 이야기의 진짜 줄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아가씨는 갑작스럽게 거대한 저택의 안주인이 된다. 게다가 맨덜리에는 레베카가 머무르던 시절부터 저택의 운영을 책임지는 댄버스 부인이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해부하듯 바라보는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어떤 흔적도 지우지 않은 채, 레베카가 살아 있던 때와 똑같이 저택을 운영한다. 레베카의 그림자에 짓눌린 주인공의 불안은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의심과 공포로 변질된다.
끝까지 언급되지 못한 ‘나’의 존재
레베카는 정작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서만 회자될 뿐이지만 그녀의 강렬함은 무시무시하게 압도적이다. 화려한 레베카, 당당한 레베카, 세련된 레베카…. 그에 비해 끝까지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아 마땅한 얼굴을 부여받지 못한 ‘나’의 존재는 어떠한가. 저자는 그 대비를 통해 주인공의 나약하고 어리숙한 젊음, 순수하고 순진해 아무것도 모르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그려낸다. 소설이 출간된 1938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인 시대였고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레베카란 인물은 기존 여성상을 뒤집고 남성을 농락하는 독립적 존재로 부각된다. 악녀로 설정된 캐릭터임에도 그녀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문득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잘 짜인 플롯에 숨은 비밀과 반전, 매끄러운 심리 묘사가 선사하는 공포. 어떤 현대 작품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다.
최고운 황금가지 출판사 편집자

주목! 이 미스터리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고형심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노나미 아사의 외

노나미 아사의

그녀는 ‘도마뱀’이라 불린다. 일본 경시청 기동수사대 소속 오토미치 다카코. “남자를 싫어하고 인간 전반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토미치는 1년 전 이혼하고, 아직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1200cc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유일한 삶의 위안인 오토미치는 기동수사대원 중에서도 특히 오토바이 탑승 기술이 뛰어나 추적 임무를 부여받는다. 일명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시공사 펴냄)다.

얼어붙을 듯이 추운 겨울 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는다. 건물 전체를 태워버릴 정도의 불이 시작된 곳은 한 남자의 몸. 상체는 새카맣게 타버렸지만 하체는 가벼운 화상만 입었다. 그의 몸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이빨 자국이 발견된다. 그러던 중 연달아 커다란 ‘무엇’에게 습격당해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체 자연 발화와 야수의 공격이라는 소재를 다룬 미스터리지만, 지은이 노나미 아사는 경찰이라는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여형사 오토미치의 심리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사건 해결을 위해 차출된 오토미치의 파트너는 하필 대놓고 ‘여자 형사 따위’라 말하는 15년차 형사 다키자와다. ‘한저씨’ 못지않은 여성 혐오 멘트를 시전하는 이 ‘일저씨’는 심지어 총 500쪽 분량 소설의 5분의 1이 지나서야 주인공에게 한마디 건넨다.

책은 여러모로 사실적이다. 특히 경찰 내 편견과 차별을 보여주는 지은이의 ‘미러링’은 너무 실감 나서 암에 걸릴 수준이다. “여자가 그렇게 정밀한 수법을 쓰겠어?” “애초에 아녀자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에요” 등의 대사는 모두 동료 경찰들의 말이다. 가까스로 새 단서를 찾거나 끝없는 탐문이 이어지는 수사 과정 묘사는 현실적이지만 속도감이 다소 떨어진다.

백미는 단연 마지막 100쪽에 있다. 오토미치가 오토바이로 ‘범인’을 쫓는 한밤의 추격신은 전반에 착착 쌓아올린 리얼리티가 계단이 돼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허김지숙 디지털뉴스팀 기자 suoop@hani.co.kr

B. A. 패리스의

그레이스와 잭은 소문난 원앙부부다. 서로 살뜰히 챙기고 꼭 붙어다닌다. 말다툼도 안 하고 항상 의견이 같다. 그러나 닫힌 문 뒤에서 부부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유명한 가정폭력 전문변호사 잭은 상대방이 공포를 느낄 때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다. 그는 “나를 두려워하는 너의 눈빛, 그걸 계속 보고 싶어. 영원히”라며 아내 그레이스를 지하실에 가둔다. 그녀의 자유를 뺏고 자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

심리스릴러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아르테 펴냄)는 가정폭력 피해자 그레이스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되며 15살 아래 다운증후군 여동생 밀리를 살뜰히 챙기던 잭에게 반해 사랑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과정이 잭의 완벽한 거짓말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이 작품은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잭이 만든 거대한 감옥에서 느끼는 그레이스의 공포감, 절망감, 배신감을 고스란히 전한다. 괴물 같은 남편과의 심리전도 긴장감을 준다. 점차 그녀는 냉정을 되찾으며 남편 잭을 파악한다. 그가 알아채지 못하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준다. 은밀하게 남편 잭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는다.

그레이스는 잭이라는 악에 맞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고 점차 강한 존재가 된다. 그의 곁에는 또 다른 여자들이 있다. 여동생 밀리와 이웃 주민 에스터. 이들과의 정서적 연대는 그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이 소설로 데뷔한 B. A. 패리스는 완벽해 보이는 커플에게 영감 받아 이 책을 썼단다. 원제는 ‘은밀히’라는 뜻의 ‘비하인드 클로즈드 도어’(Behind Closed Doors)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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