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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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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망치러 온 구원자, 워너원!

데뷔 쇼케이스 티켓 순식간에 매진된 아이돌 ‘워너원’…

아이돌 ‘1도 모르는’ 기자의 팬덤 취재기
등록 2017-07-20 08:48 수정 2020-05-02 19:28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 페이스북 캡쳐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 페이스북 캡쳐

“기자님, 이러다 우리 ○○ 욕먹이는 거 아니에요?”

7월12일, 수화기 너머로 한 팬이 경계하듯 말했다. 마음에서 소나기가 내렸다. “죄송해요. 실은 제가 아이돌 문화를 잘 몰라서요.” ‘잘 모른다’는 것도 사실 체면치레다. 취재하면서 느꼈다. 나는 아이돌을 정말 ‘1도’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고정픽’ 이름을 틀리다니

아이돌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내가 이 취재를 시작한 것은 주말(7월8일)에 벌어진 ‘줄서기 대란’ 때문이었다. 습도, 온도, 산발적 비. 불쾌지수를 높이는 날씨 3종 세트를 고루 장착한 토요일이었다. 전국의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워너원 멤버 브로마이드를 얻기 위해서였다. 매장마다 매직으로 글씨 쓴 흰 종이가 속속 나붙었다. ‘강다니엘 품절이에요.’ ‘황민현, 박지훈, 김재환 없어요.’

워너원은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병아리 아이돌’이다. 그러나 이들의 데뷔 팬덤은 전무후무하다. 4월7일~6월16일 방영된 엠넷(Mnet)의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 ()에서 시청자인 ‘국민 프로듀서’(국프)가 투표로 1∼11등을 선발해 데뷔시킨 그룹이기 때문이다. 11회 방송이 이어지는 동안 멤버들의 순위는 요동쳤고, 그 과정에서 팬들의 희로애락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러면서 방송 몰입도와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데뷔 그룹의 화제성도 높아졌다. 8월7일 예정된 데뷔 쇼케이스는 2만 석 규모의 국내 유일 야구 돔구장인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다. 데뷔 쇼케이스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7월12일은 팬클럽 회원, 7월13일엔 일반인을 대상으로 저녁 8시에 오픈한 티켓 예매는 정시가 되자마자 접속이 폭주해 연결이 안 됐다. 오픈 직후 전석이 매진됐다.

워너원의 화제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들에 대한 팬덤의 특징은 뭘까.

‘○○ 욕먹일지 모른다’며 나를 경계한 대학원생 A(29)씨의 우려는 근거가 있다. 왜냐면, 내가 ‘우리 ○○’의 이름을 잘못 불렀기 때문이다. 국프들은 이름 틀리는 것에 민감하다. 후보 101명 가운데 좋아하는 멤버(고정픽)를 데뷔시키려면 투표를 해야 한다. 마지막 데뷔조(1~11등)를 선정하는 생방송에선 문자 투표 1건이 7표의 효력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오타는 무효표가 된다!

국프들은 ‘내 연습생’이 데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체 이벤트를 열며 주변인에게 투표를 독려했다. 9등으로 워너원 멤버가 된 황민현을 고정픽으로 가졌던 B(32·의사)씨는 “민현이가 11위 이상이면 치킨, 9등 이상이면 삼겹살, 5등 이상이면 소고기를 쏜다”는 이벤트를 열었다. 방송 중·후반부터 인기몰이를 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강다니엘의 팬 C(28·회사원)씨도 “투표 인증샷 보내주시면 내일 커피 살게요”라는 아이템을 내걸었다. 한 번 만난 뒤로 다시 연락 안 한 소개팅남, 고등학교 이후 1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동창에게까지 연락했다. 그래서 싱글남 사이에선 ‘가 좋은 프로그램’이란 말이 오갔다. 오래 연락 않고 지낸 여성들이 먼저 연락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라나. 각고의 ‘독려’로 얻어낸 문자 인증샷이 오타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7등으로 워너원 멤버가 된 라이관린 팬들은 특히 예민하다. ‘라이광린’ ‘라이 (띄우고 ) 관린’ ‘라이린관’…. 부탁하는 처지에 화낼 수도 없고, 잃어버린 표가 몇 표더냐. 이런 국프의 노고를 모른 채 고정픽 이름을 틀리게 부르다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룹 팬덤 아니고 개인 팬덤
‘국민프로듀서’들의 투표 등으로 결정된 순위에 따라 생존과 방출이 결정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의 방송 장면(위쪽). 워너원 멤버가 찍은 이니스프리 광고. 이니스프리는 1만원당 워너원 멤버의 브로마이드 한 장을 주는 이벤트를 해 ‘줄서기 대란’을 일으켰다.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 페이스북, 이니스프리 누리집

‘국민프로듀서’들의 투표 등으로 결정된 순위에 따라 생존과 방출이 결정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의 방송 장면(위쪽). 워너원 멤버가 찍은 이니스프리 광고. 이니스프리는 1만원당 워너원 멤버의 브로마이드 한 장을 주는 이벤트를 해 ‘줄서기 대란’을 일으켰다.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 페이스북, 이니스프리 누리집

A씨가 걱정한 것은 그가 워너원 팬은 아니라는 고백 때문이었다. 그는 전체 팀이 아닌 고정픽만의 팬이다. ‘1도 모르는’ 기자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막 기사를 쓸까봐 우려하는 눈치였다. “우리 ○○는 데뷔를 했지만, PD가 갑자기 밀어준 (것으로 보이는) 후보들이 방송 분량을 확보하면서 순위가 올라가고, 정말 잘하는 연습생이 떨어졌어요. 싫어하는 멤버들도 워너원에 포함됐기 때문에 워너원을 좋아할 수는 없어요.” 취업준비생 D(26)씨도 “프로그램 특성상 한 명만 뽑다보니 그 사람만 좋아하게 된다. 나머지 10명은 누군지 헷갈릴 때도 있다”고 말했다. A씨는 데뷔 쇼케이스에는 안 갈 생각이다. D(26)씨는 쇼케이스에 가려고 했지만(티케팅에 실패했다), 가려는 것은 워너원 때문이 아니라 고정픽 때문이다.

워너원 팬덤의 특이점은 팬심이 그룹이 아니라 개인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이돌 팬들은 ‘단결’을 해치는 개인팬을 싫어했다. “다른 가수 팬들과 싸우기도 벅찬데, 같은 팬들끼리 편이 갈리고 싸우는 일은 자멸을 자초하는 반역 행위”(박은경, [god, 스타덤과 팬덤], 한울, 2003)였기 때문이다. H.O.T, god 등 1세대 아이돌 팬덤의 ‘그룹 중심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옅어지는 추세다. 조성민 대중음악평론가는 “엑소나 세븐틴처럼 멤버가 10명이 넘어가는 다인원 아이돌이 나오면서 팬덤의 파편화가 시작됐다. 물리적으로 그 많은 사람을 다 좋아할 수는 없다는 합리적 근거가 생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는 물밑에서 진행되던 개인 팬덤화를 전면화했다. 애초에 이 프로그램은 모두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101명 가운데 오직 11명만 살아남았다. 당락이 결정되는 마지막 등수를 제일 마지막에 불렀다. 1~10등을 역순으로 공개한 뒤 맨 마지막에 11등을 공개하는 식이다. 김윤하 음악평론가는 “잔인한 경쟁 구도에서 각자의 연습생을 지키려는 어마어마한 개인 팬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 기죽으면 안 되니까”

요즘 워너원 팬들은 힘들다. 자본은 이미 1~11등이란 ‘딱지’가 붙은 멤버들을 대상으로 또 투표를 시킨다. 애초에 이니스프리는 투표 수 10만 건을 달성한 멤버만 디지털 화보를 제공한다고 해 ‘또 투표시킨다’는 빈축을 샀다. 워너원이 출연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도 ‘미션을 수행할 멤버들을 매칭시키라’는 투표 과제를 내주고 있다. 기획사 YMC엔터테인먼트는 데뷔 타이틀곡도 투표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D씨는 “제발 투표 좀 그만하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 기죽으면 안 되니까…”라며 또 투표에 참여했다. 아이돌 웹진 미묘 편집장은 “워너원은 1년6개월이라는 한정된 계약 기간을 가진 ‘비정규직 아이돌’이고 이들의 팬덤은 멤버 하나하나의 앞날을 걱정한다. 개인 팬덤이어도 독특한 로열티가 있다”고 말했다.

몇몇 팬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식지 않는’ 자신의 팬심에 놀라는 눈치다. 강다니엘의 팬인 C씨는 말했다. “그를 좋아하면서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영화 에서 아가씨가 숙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요. 내 일상을 망치러 온 구원자.” 워너원과 그들의 팬. 이들은 서로에게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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