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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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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표를 노래하다

뇌전증 어린이·가족과 가수 이한철의 ‘쉼표합창단’…

공연하며 자신감 회복하고 사회적 인식 개선
등록 2017-07-11 07:40 수정 2020-05-02 19:28
‘쉼표합창단’이 7월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무대에서 노래 <해브 어 굿 타임>에 맞춰 율동을 선보이고 있다. CBS TV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방송을 위한 콘서트였다. 가운데 손 든 남자가 박관영씨고, 왼쪽 아래가 딸 박혜송양이다.

‘쉼표합창단’이 7월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무대에서 노래 <해브 어 굿 타임>에 맞춰 율동을 선보이고 있다. CBS TV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방송을 위한 콘서트였다. 가운데 손 든 남자가 박관영씨고, 왼쪽 아래가 딸 박혜송양이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성악을 전공한 아빠는 병원에서 네 살 아이 손을 잡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아이와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일지 몰랐다. 이날은 아빠에게도 아이에게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코르넬리아드랑게증후군과 뇌전증을 앓는 혜송이는 2013년 4월1일 하루 동안 여섯 번 발작을 일으키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아빠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빠는 딸이 평소 두 손 모아 ‘꼬물꼬물’ 따라하기 좋아하던 노래 를 불러줬다. 그 순간 혜송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적이었다.

노래가 아이를 살렸다

“바람이 너무 불어와 흔들릴 때 서로가 안아주면 쉬운 일이지~.”

2017년 7월4일 아빠는 또 한번 딸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도 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다만 장소가 병원이 아닌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공연 무대로 바뀌었다. 700명 관중 앞에 선 아빠 박관영(44)씨와 딸 박혜송(8)양은 디스코 리듬에 맞춰 몸을 신나게 흔들었다. ‘쉼표합창단’ 일원으로서 말이다.

쉼표합창단은 뇌전증 어린이를 둔 다섯 가족이 함께 만든 아마추어 합창단이다. 싱어송라이터 이한철(45)씨가 감독을 맡고 한국뇌전증협회, 한국에자이주식회사 등의 지원을 받아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잠시 멈췄다 간다는 의미의 ‘쉼표’는 뇌전증을 상징한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과도하게 흥분해 발작을 일으키는 질병이다. 발생 원인과 증상이 다양하고 전세계 인구의 1%가 앓고 있을 만큼 흔하다.

박관영씨는 쉼표합창단 이름이 좋았다. “제가 특수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있거든요. 합창단 이름엔 주로 음표, 오선, 하모니 같은 동적인 단어가 들어가요. 반면 쉼표는 정적이면서 편안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쉼표합창단은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려는 목표가 있다. 뇌전증 환자는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자기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비장애인도 있다. 쉼표합창단은 뇌전증이 주변에 피해를 주는 무서운 질병이 아니라 삶에 잠시 멈추는 순간(쉼표)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1~2분에 이르는 그 쉼표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조윤서(44)씨는 뇌전증을 가진 최민준(13)군의 엄마다. 조씨는 뇌전증 자체보다 이로 인한 2차 손상을 더 걱정한다. 몸이 경직되면서 넘어져 다치는 환자를 종종 봐왔다. “발작 때 주변에 있던 사람이 다가가 손만 잡아줘도 부상을 막을 수 있어요. 대발작이 일어날 땐 옆으로 눕혀서 거품이 기도로 들어가지 않게 응급처치만 해줘도 살 수 있고요. 나부터 뇌전증을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쉼표합창단 활동을 하게 됐어요.”

무대 위에서 아파도 괜찮아

싱어송라이터 이한철씨는 3년째 ‘나우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왼쪽). 2015년 첫 프로젝트로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와 함께 노래 <가까이>를 만들었다. 이한철

싱어송라이터 이한철씨는 3년째 ‘나우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왼쪽). 2015년 첫 프로젝트로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와 함께 노래 <가까이>를 만들었다. 이한철

조씨는 공연하며 위안을 얻었다. 5월11일 서울 홍익대 앞 소극장에서 공연할 때 민준 몸에 강직이 왔다. 예전 같으면 숨겨야 하나 고민됐을 텐데, 이날은 달랐다. ‘무대 위에서 아파도 괜찮아,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야’라는 마음이 들었다.

민준이도 변했다. 공연 전엔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존감이 자꾸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뇌전증 환자는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거나 우울증, 자살충동을 느끼는 비율이 높다. 민준이는 음원 녹음과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성취감을 느꼈다. 관객에게 받은 우레 같은 박수는 “큰 선물”로 다가왔다. 조씨는 “공연 자체야 중구난방, 좌충우돌이지만 아픈 걸 털어놓고 또래 아이들과 편하게 어울리며 민준이한테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쉼표합창단은 3월26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4주간 매주 일요일 연습을 했다. 뇌전증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도 맞춰 입었다. 노래 (Have a Good Time)은 이한철 감독이 직접 작사·작곡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발랄한 율동은 연세대 춤동아리 하리(HARIE)에서 만들었다.

‘햇살이 강할 때 서로 그늘이 되어주자’는 노랫말에 맞춰 아빠·엄마는 손을 맞잡고 아이에게 ‘인간 그늘’을 만들어줬다. ‘바람에 흔들릴 때 서로 안아주자’는 마디에선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힘을 모았다. 공연은 뇌전증 아이뿐 아니라 온 가족에게 힐링이 됐다. 손정인(6)군의 엄마 이선희(46)씨는 “모임 때마다 삼림욕에 다녀온 것처럼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박관용씨는 다섯 아이 사이의 이질감이 사라졌다고 했다. 예전엔 혜송이가 비장애인인 다른 형제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박씨는 아이들이 쉼표합창단 활동을 좋아하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었다. “너희가 이렇게 즐거운 건 혜송이 덕분이야.” 그 뒤로 네 아이가 혜송이를 살뜰히 아끼기 시작했다.

쉼표합창단은 지금까지 총 세 번 공연을 했다. 5월8일 음원 발표날 한 번, 5월11일 홍대 앞 소극장에서 한 번, 7월4일 CBS TV 프로그램 녹화방송에 출연해서 한 번. 네 번째 공연은 8월5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리는 ‘소아청소년문화축제’의 한 토막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쉼표합창단의 공연 모습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고, 음원은 멜론과 지니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음악은 오선지 안에만 있지 않다

쉼표합창단은 이한철 감독이 2015년부터 이어오는 ‘나우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나우프로젝트는 사회 통념상 음악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음악의 주인공으로 불러들이는 작업이다. 이 감독은 2015년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와 함께 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가사를 짓고 노래하며 서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2016년엔 만 55살 이상 아마추어 음악인으로 구성된 ‘노년반격’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올해는 노년반격 2탄과 쉼표합창단을 만들었다.

이한철 감독은 나우프로젝트를 ‘재능기부’나 ‘봉사’로 부르는 걸 원치 않는다. “너무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아서” 싫다고 했다. 사실 그도 얻어가는 게 있다. 평소 자신의 음악 스타일과 다른 음악을 접하며 자극을 얻는다. 노년반격팀과 함께하며 ‘블루그래스’라는 컨트리송 장르의 매력을 새롭게 느꼈다. 음정이 맞지 않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서 감동과 행복감을 느낀다. “음악이 꼭 오선지 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이한철 감독이 말했다.

나우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제약회사 한국에자이도 얻어가는 게 있다. 이 회사의 서정주 탤런트이노베이션부장은 “환자를 자주 만나 뭘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고 오라는 게 회사의 방침”이라며 “환자가 느끼는 삶의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데 이런 활동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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