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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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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사는 애인

잘못 든 길에서 귀한 꽃과 풀을 만나는 황홀한 순간
등록 2017-03-16 13:35 수정 2020-05-02 19:28
선운산에서 만난 ‘봄의 난초’ 춘란. 김선수

선운산에서 만난 ‘봄의 난초’ 춘란. 김선수

바야흐로 봄꽃의 계절이다. 아직 눈이 쌓였지만 남쪽에서 변산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 황홀한 꽃 사진들이 올라온다. 산행 중에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꽃을 만나는 건 망외(望外)의 기쁨이다. 일부러 꽃을 찾아가도 알현하기 쉽지 않다.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야만 한다. 산행 위주로 하다보면 더욱 어렵다. 그래서 예기치 않게 특별한 꽃을 만날 때의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꽃을 찾아 일부러 등산로를 벗어나기도 하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가 만나기도 한다.

2009년 5월27일 지리산 종주 때였다. 운무가 낀 날씨였다.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넘어가는 능선에서 속이 좋지 않아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났다가 청초한 흰 꽃을 피운 나도옥잠화를 만났다. 한 줄기씩 위로 쑥 올린 꽃대에 몇 개의 흰 꽃이 달리고 두꺼운 잎은 아래쪽에 퍼져 있다. ‘나도옥잠화’란 이름은 넓고 두꺼운 잎이 옥잠화를 닮아서 붙은 것이란다. 옥잠화는 꽃이 옥비녀를 닮았다는 뜻이다. 나도옥잠화꽃은 옥잠화꽃과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고고하다. 고산 지역 습한 곳에서 서식한다는데, 나는 지리산에서만 보았다.

꽃 이름에 ‘나도∼’ ‘너도∼’가 붙은 것들이 있다.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 너도바람꽃 등등. 인간이 편의상 분류해 마치 아류처럼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구는 신의 정원에서 나도옥잠화꽃을 만나 ‘고고한 기품에 정신이 아득하고 땀 흘리며 헤맨 수고를 잊은 채 넙죽 큰절을 했다’고 한다. 나도옥잠화꽃을 만난 날 오후 늦게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남쪽 샘터에서 흰 꽃을 피운 왜갓냉이를 만났다. 역시 쉽사리 만나기 힘든 꽃이다. 2013년 6월2일 지리산 종주를 할 때 이 꽃들을 특별히 찾았다.

2010년 3월27일 선운산을 찾았다. 하연재에서 시작해 배맨바위, 낙조대, 천마봉, 국사봉, 수리봉을 찍고 벌봉을 거쳐 경수산으로 내려왔다. 경수산에서 내려오며 ‘봄의 난초’인 춘란 세 개체를 만났다. 가냘픈 꽃대 하나에 꽃이 하나씩 있었다. 봄을 알려준다는 의미로 보춘화(報春花)라고도 한다. 연약하지만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오철수 시인은 춘란을 ‘겨울을 넘어선 전사이면서 동시에 봄인 아이 같은 꽃!’이라고 했다. 부드러움이 낡은 두께를 뚫고 꽃을 피운 것이다. 배맨바위, 낙조대, 수리봉에서의 조망과 도솔암도 좋았지만 춘란은 지금까지 황홀함의 여운이 있다.

2013년 5월19일 한북정맥상에 있는 경기도 포천 국망봉을 찾았다. 휴양림에서 올라 정상 직전 급경사 구간에서 잠시 쉬다가 붉은색의 애기송이풀꽃을 만났다. 이 구간은 겨울에 눈이 쌓였을 때 오르려면 한 걸음 오르고 두 걸음 미끄러질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애기송이풀꽃은 딱 보는 순간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멸종위기종이란다. 줄기가 짧다보니 앉은뱅이처럼 키가 작아 보여 ‘애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송이풀들 중에선 가장 큰 편이다. 꽃이 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꽃을 피우고 2∼3일이면 시들기 때문에 이 시기에 맞춰 가야 만날 수 있다.

죽령에서 남쪽으로 도솔봉이 솟아 있다. 소백산 줄기의 연장이다. 2013년 7월13일 죽령에서 올랐다. 정상 오르는 길에 흰 꽃을 피운 왜솜다리를 만났다. 솜다리는 보통 에델바이스라 한다. 여름부터 가을 사이 설악산에서 만날 수 있다. 도솔봉 정상은 암봉으로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간이 있다. 길쭉한 꽃대에 열을 지어 황백색 꽃을 피운 가는다리장구채가 낭떠러지 아래를 관망하고 있다. 거의 3시간을 올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뜻밖의 해후를 했다.

소백산 주능선에 서식하는 노랑무늬붓꽃도 멸종위기종이다. 붓꽃인데 각 꽃잎의 안쪽에 노란 줄이 있는 게 보기에도 고상하다. 2008년 5월24일 소백산 철쭉을 보러 갔다가 알현했다. 2010년 5월3일 울릉도 선인봉에서 만난 섬노루귀, 2015년 6월27일 설악산 집선봉에서 만난 바람꽃과 구름솔체꽃, 2013년 4월21일 태백산 유일사 능선에서 만난 한계령풀 등도 잊을 수 없다.

이런 꽃들과 만나기에 애인 만나러 가는 설렘을 안고 집을 나선다.

김선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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