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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폭력 탈출기 모은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등록 2017-03-16 13:32 수정 2020-05-02 19:28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의 시 ‘가족’ 전문이다. 가족은 아름답지 않다. 평화롭지도 않다. ‘가족은 아름답고 따뜻해야 한다’는 사회의 믿음이 감옥이고 지옥인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는 당신이거나 당신 옆 사람이다. 정부의 전국 가정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비율은 45.5%(2013년 기준). 두 집 건너 한 집꼴이다.

무엇이 가정폭력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가. 무엇이 피해자를 침묵시키는가.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눈에 보이게 찢어지고 부서져야 폭력으로 ‘인정받는’ 현실, 그럼에도 잘못한 것은 없는지 피해자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현실, 100명 중 1명만 국가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현실, 그마저도 반 이상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현실, 돌아가면 다시 함께 살아야 할 가해자 앞에서 처벌을 원하느냐고 묻는 현실에 대해 이것 말고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정교하게 짜인 오래된 악순환이다.”

(오월의봄 펴냄)는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 머물렀던 여성 8명이 글쓰기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쓴 글을 모은 책이다. 2013년 한국여성의전화 창립 30주년 기획에서 시작됐다.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대물림, 범죄로 인정받기 쉽지 않은 부부강간, 자녀들이 겪는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이유 등을 당사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혼소송 중인 사람, 이혼소송이 끝난 사람, 재결합한 사람 등 ‘후속 경험’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가정폭력 연구서 (교양인 펴냄)을 쓴 정희진이 서문 ‘강남역 사건과 가정폭력 사이-페미사이드와 사소함의 정치학’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읽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정상’이라고 본다. 이것은 일상의 홀로코스트다. (…) 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믿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는가? 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고 외쳐야 하는가?”

전문가들은 매일 여성 십수 명이 가정폭력과 성산업 노동 중에 사망한다고 추정한다(정희진). 가해자는 부자, 빈자, 변호사, 의사, 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다. 가해자의 계급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피해자는 주거와 일자리 등 물리적 지원이 절실한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탈출’이 필요한 일. 정희진이 기획 단계에서 제안한 책 제목은 ‘여성 살해(페미사이드)의 현장에서 탈출한 여성들’이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조는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가정의 회복, 건강한 가정 꾸리기는 일단 ‘개인’이 생존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가정을 살리려고 개인을 죽이면 안 된다. 24시간 운영되는 여성긴급전화는 1366.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는 02-2263-6464.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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