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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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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등록 2017-03-09 03:58 수정 2020-05-02 19:28

아직 겨울을 품고 있는 차가운 공기가 싫지 않은 계절입니다. 눅진한 지하철을 벗어나 마주치는 도심의 아침 공기조차 한껏 마시면 머릿속이 맑아집니다. 이제 곧 봄이겠지요.

요즘 매일 꽃을 봅니다. 출근길에 지나치는 백화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지하도를 나오자마자 그 백화점의 기둥을 뚫고 나와 가득 찬 분홍빛이 진짜 꽃인 줄 알았습니다. ‘돈으로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시큰둥한 척했지만, ‘벌써 꽃이 저렇게 예쁘게…’ 두근거려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이내 기가 막히게 잘 만든 진짜 같은 가짜라는 것을 알고는 장삿속에 놀림당한 기분이라 부아가 났습니다. 나무뿌리가 바위를 가른다고 하지만 나뭇가지가 콘크리트 벽을 뚫었을 리는 없겠지요.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근사한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결국 ‘진짜가 아니다’라는 다짐을 하고 가까이 가기로 했습니다.

성급한 마음은 어느 순간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괘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꽃잎 한 장 떨어지지 않는 조화를 보며 즐거웠습니다. 그 주위를 지날 때면 꽃향기가 가득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찌든 겨울옷을 몸에 걸치고 마음만 벌써 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저를 쇼윈도에서 보았습니다. 우스웠습니다.

봄을 맞으려면 할 일이 있는데, 몇 년간 덧없이 계절을 보내기만 했는데, 특히 지난 세 번의 봄은 ‘꽃 피는 봄’이 아니라 ‘꽃 지는 봄’이었는데, 왜 유독 올해는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미리 당겨쓰려 안달일까?

이제 묵은 겨우살이들을 말끔히 털어 정리하고 산뜻한 봄의 것들을 꺼내야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봄의 꽃을 찾으러 나가겠습니다. 어떤 꽃이 어디에 피는지 꽃이 진 자리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바위를 가른 뿌리에서 뻗은 가지로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와 피운 꽃도 보고 싶습니다.

글·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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