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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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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향한 선율

아프고 가난한 어린이들 돕는 해금 연주자 신날새씨
등록 2017-01-06 08:46 수정 2020-05-02 19:28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그 소리는 깽깽거리며 울기도 했고, 애교를 부리거나 앙탈하기도 했다. 섬세한 고음은 때로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소리를, 때로는 선득한 광기가 느껴지는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거친 듯 여린 듯 쉰 듯, 그러면서도 애련하고 신명이 났다.”(류경 중편소설 ‘내 이름은 월아’)

‘그 소리’는 해금(奚琴)이다. 한국소설에서는 드물게 해금 연주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 나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영하 273.15도, 절대온도와 같은 근원적 물음. 소설 속 인물은 해소의 실마리를 다름 아닌 해금 선율에서 찾는다.

해금은 명주실을 단단히 꼬아 만든 두 줄을 활로 마찰시켜 내는 국악기다. 연주 소리에 빗대어 ‘깡깡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지 대략 천년. 고려 때 노래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이나 (‘종지(宗智)의 해금’)에 나올 만큼 오래된 악기다. 그러나 여전히 해금은 대중에게 친숙한 악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해금을 널리 알리고, 바라는 이들에게 직접 찾아가 공연을 열고, 입장료 대신 자유롭게 후원금을 받아 조용히 선행을 하는 연주자가 있다. 2016년 12월28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소극장 ‘스페이스 바움’에서 단아한 해금 연주자 신날새(31·헉스뮤직)씨를 만났다. 그의 독특한 이름은 ‘날마다 새롭게’라는 뜻.

그의 이름 ‘날마다 새롭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해금을 연주한 신씨는 국악중·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여러 국악기 중에서 덩치가 작아 가지고 다니기 편하고 연주하는 모습도 예뻐서 택한 게 해금이라고 한다. “제일 큰 이유는 손이 안 아플 것 같아서였는데요. 전공으로 시작하면서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파이기도 했어요.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조이면서 연주하니까요.”

대학생이던 2007년 정규 1집 음반 를 냈으며, 2016년 10월 네 번째 음반()을 발표했다. 지난 12월에는 로이킴·하림·정인 등 여러 음악인들이 만든 리메이크 음반 에 참여해 노래 을 해금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를 보기 전에는 짝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노래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김광석이 딸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 깊은 사랑을 말하는 노래란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신씨가 ‘나눔음악회’를 처음 연 것은 2012년 5월이다. 국제 비영리 문화단체 ‘월드컬처오픈’(WCO) 서울사무소가 연 청각장애 아동 돕기 재능기부 콘서트. 이 단체에서 그에게 참여를 먼저 제안했단다. 수익금 모두를 보청기 지원에 쓰는 음악회. 소리를 온전히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난 그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어린이들이 저한테 의미가 커요. 우리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인데 아프거나 불편해서 무언가를 못하는 게 안타까워요. 제가 외동딸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동생 같기도 해요. 아이들이 잘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신나게 지내면서 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날 공연을 시작으로 신씨는 2016년 10월까지 22차례 나눔음악회를 열었다.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인 관객이 자유롭게 모금함에 후원금을 낸다. 이 돈으로 그동안 저소득층 청각장애 어린이 19명에게 보청기를 선물했다. 그의 뜻에 공감한 보청기 제작업체(‘딜라이트’)도 최소 금액으로 보청기를 제공했다.

2016년부터는 한국소아암재단을 통해 아픈 어린이들을 돕기로 했다. 2015년 11월부터 건강보험의 보청기 구입 지원액이 크게 늘면서 후원 대상을 바꾸게 된 것이다. 최근 신씨는 2016년 하반기 후원금 167만여원을 이 재단에 기부했다.

어린이들에게 ‘소리’ 선물
해금 연주자 신날새(맨 오른쪽)씨의 팟캐스트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공개방송 모습. 헉스뮤직 제공

해금 연주자 신날새(맨 오른쪽)씨의 팟캐스트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공개방송 모습. 헉스뮤직 제공

“보청기를 후원받은 아이들을 매번 나눔음악회에 초대해요. 먼 거리에 사는 친구들은 못 오기도 하지만, 아이들 몇 명을 만난 적도 있어요. ‘잘 들리니’라고 물었을 때 ‘잘 들려요’라는 말을 들어 뿌듯했어요. 음악이 들리니까 공부도 더 잘할 수 있게 됐다는 아이도 있었고요.”

나눔음악회를 여는 비용은 모두 신씨와 소속사에서 부담한다. 초대 음악인들도 출연료를 받지 않는다. 매달 후원계좌(우체국 014167-02-367641)에 정기이체로 후원금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2016년 하반기부터는 음악회 신청도 받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나눔음악회’다.

나눔음악회의 뿌리는 2011년 9월 시작한 팟캐스트 ‘신날새의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팟캐스트 공개방송이 자연스레 나눔음악회로 이어졌다. 평소 자신이 읽는 책들 가운데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글을 낭독하고 자기 생각을 담담하게 전하는 프로그램.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올려 지금까지 225편이 청취자와 만났다.

“최근 열매에 대한 시를 낭송했어요. 참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든 생명이 잉태될 때도 마찬가지인데, 살아 있는 것은 모든 게 둥글지 않으냐는 의미를 담은 시였어요. 세상이 험하고 모난 것 같아서 그런 시를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다독이랄 수는 없지만 꾸준히 책을 본다는 그는 ‘가만한 독서’를 좋아한다. 작곡을 하거나 음악에 제목을 붙일 때 책에서 읽고 기억한 것들이 영감을 준다고도 했다.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날, 산길을 오르다가 꽃을 보았대요.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꽃이 나를 보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거예요. 당신한테도 당신을 향해 피는 꽃이 있다는 메시지였어요. 어느 작가의 글에서 읽은 대목이에요. 제가 추구하는 음악 색깔도 무조건 조용하고 잔잔한 게 아니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해금으로 이런 곡들도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작품을 냈다면, 앞으로는 창작곡 위주로 ‘신날새의 음악’을 해야 할 시기 같아요.”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소리
해금을 들고 선 신날새씨. 그는 앞으로도 아프고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음악회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박승화 기자

해금을 들고 선 신날새씨. 그는 앞으로도 아프고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음악회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박승화 기자

해금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악기 가운데 하나다. 활을 쓰는 악기라는 점에서 서양 악기 바이올린에 견주기도 한다. 두 악기의 음색을 비교한 결과, 해금은 거칠고 명확하며 긴장되는 음색이고 바이올린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모호하며 이완되는 특징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조원주·김준, ‘해금과 바이올린 음색에 대한 언어적 표현 분석’, 30, 2013). 신씨는 해금의 특징·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해금은 특히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해요. 손으로 줄을 주물러서 음을 잡는 악기라서, 줄을 누르는 방법이나 습관에 따라 연주자의 색깔이 드러나요. 바이올린은 한 음을 내면 꽉 찬 느낌이 나는데, 해금은 속이 비어 있는 듯한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소리가 나요. 서양 음악처럼 딱 악보를 ‘소화’하는 느낌이 안 나고 기분대로, 분위기에 맞춰, 흥에 따라 변화하는 음악이에요.”

팔음(八音). 놋쇠, 돌, 명주실, 대나무, 바가지, 흙, 가죽, 나무. 국악기를 만드는 여덟 가지 재료. 신씨는 여덟 가지 재료가 모두 쓰이는 유일한 국악기가 바로 해금이라고 했다. 줄을 쓰기 때문에 현악기로 분류되지만, 울림통이 있어 관악기로도 들 만큼 독특하다고 했다. 해금이 단 두 줄로 삼라만상, 희로애락애오욕을 담아내는 연유다.

소리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마음을 울리며, 울린 마음이 실천에 닿아, 마침내 세상을 따뜻하게 덮는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해금 연주자 신날새씨가 희망하는 길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뒤 팟캐스트에 남긴 말을 가만히 들으면, 그가 어떤 무늬의 사람인지 넉넉히 짐작하게 된다.

“그대의 치유를 응원합니다”“우리가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수록 우린 너무나 바쁘고, 사회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습 그대로 쌩쌩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린 기대와 희망을 착각합니다. 희망은 조건을 만족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을 꿈꾸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정혜윤 작가의 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의문을 부르는 이 사회는 우리의 뜻과는 다르게 무너져가고 있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속상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불가능을 꿈꾸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기대’는 일어날 것을 알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마음을 정반대의 마음으로 바꾸어가는 적극적인 생각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을 키우는 일, 그것이 희망이 아닐까요?
무슨 말로도 위로되지 않을 일을 겪으며 우리 모두가 너무 속상하고 아픕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용서를 비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더 잘못하고 덜 잘못했는지, 누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지… 잘잘못을 따지거나 순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이미 용서가 아닙니다.
그러고는 우리, 희망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선한 일과 정의가 넘쳐나는 사회를, 그래도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시간 속에서 다시 새살처럼 돋아날 그대의 치유를 응원합니다.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신날새입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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