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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 논란 통해 본 지식의 망탈리테
등록 2016-11-24 04:49 수정 2020-05-02 19: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LCHF(Low Carbohydrate High Fat), 일명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 논쟁이 여전히 뜨겁다. 발단은 지난 9월19일과 26일에 방송된 이었다. 방송 이후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에 대한 갑론을박은 종교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세졌다.
한편에선 반대성명을 발표하는 등 집단적 움직임을 보이고, 다른 한편에선 오랫동안 검증된 다이어트 방식이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미디어는 앞다퉈 이 다이어트 방식을 소개하고 전문가의 소견을 곁들였지만, 같은 기사 내용에 대해서도 극도로 상반되는 해석이 쏟아졌다. ‘특정 음식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며 환영하거나, ‘제대로 취재하지 않아 오류가 많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는지 검증된 바는 없다’며 단정짓기도 한다.
가만히 지켜보니 이런 논쟁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간헐적 단식’이 나왔을 때도, ‘해독주스’가 널리 회자됐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던가. 소재가 달라졌을 뿐, 질문은 변함없는 듯하다.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사이로 우리 마음은 항상 요동쳤던 셈이다.
환호의 이유, 쾌감과 현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본격 소개한 은 여느 다이어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과 같이 일화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물론 전문가 인터뷰나 이론적 설명을 담은 자료 화면을 통해 전문 지식이 전달되지만, 그보다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반인의 등장이다. 프로그램 속 일반인 사례는 ‘나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의 의심을 무장해제시킨다. 더군다나 사례자들의 극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건 무엇보다 믿을 만한 증거가 된다.
프로그램을 떠나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이 반향을 일으킨 데는 크게 세 요인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상식의 파괴와 금기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쾌감이다. 지방은 필수영양소임에도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에 비해 죄악시돼온 경향이 있다. 특히 지방과 관련된 시각적 공포가 확산되고 지방 섭취를 살이 찌는 현상과 직접 결부하면서 지방은 필수영양소가 아닌 불필요영양소로 둔갑했다. 그동안 움츠려 있던 지방에 대한 불안감이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를 통해 일순간 해소된 것이다.
이에 더해 섭취의 적정선에서 벗어나는 해방감도 한몫했다. 지방과 층위는 다르지만, 그동안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당분이나 염분에 대한 경고 또한 상당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든 ‘적정한 양을 적정한 선에서 섭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탄수화물을 적게 섭취하는 대신 지방은 생각보다 많이 먹어도 된다는 명제에서 일종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둘째, 현대 한국인의 식생활 변화 양상이 해당 식이요법과 현실적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오랜 농경문화 전통에 따라 밥, 즉 쌀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가 강조돼왔다. 그러나 서구의 식생활이 소개되는 한편 현대의 일상 패턴이 과거 농경사회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임에 따라 쌀을 배제한 식생활이 가능해지고 있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실천하는 것은 쌀 중심 식단보다 시간·경제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생기는 것이다.
셋째,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단시간에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무병장수보다는 체중 감량에 있다. 체중 감량이란 분명한 동기를 충족하는 빠른 효과는 즉각성과 즉시성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특질이기 때문에 각광받는다고 할 수 있다.

전문적 지식 이후의 지식
이처럼 특정 지식을 수용하는 데 믿음이라는 마음 형태가 주요하게 작용한다고 가정한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지식이 성립되는 조건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꽤나 오랫동안 지식은 ‘지식인’이라는 특정 집단에 의해 만들어져 (지식인이 아닌) 대중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각 문화권과 시대에 따라 지식인에 대한 정의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예컨대 서구에서 근대 이전 사람들은 주술사와 같은 당시의 전문가에게 자문했다. 전근대의 주술사는 추상적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과학적 척도에 근거한 ‘맞고 틀림’의 문제보다는 가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해 지식을 구분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주술사의 역할은 교회 성직자에게로 넘어갔다. 중세 교회의 성직자들은 ‘신의 언어’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특권적 소수로서 신과 삶을 밀착시켰던 중세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합리주의적 사고 강조와 함께 근대가 시작되자 지식은 ‘학자’라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 손에 넘겨졌다.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아의 위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학자에게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덧입혀짐으로써 근대 이후 지식은 한동안 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근대적 합리성으로 인해 인류가 놓쳐온 것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일면서 ‘전문 지식’에 대한 회의가 잦아들었다. 예를 들면 지식은 이른바 ‘전문적 지식인’이라는 특정 집단에서만 생산돼야 하는지, 단일한 대상에 대해 복수의 지식이 공존할 수는 없는지, 또는 결과로서 지식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지식이 간과돼온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이런 질문들은 지식에 대한 정의뿐 아니라 지식이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을 요구했다. 즉 지식이 비단 이성-언어-이론으로만 이뤄지는지, 이런 가정 안에 포함되지 않는 지식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예견대로 현대의 지식은 ‘가설 형태’로 존재하는 가운데 대중의 머리가 아닌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어쩌면 누구나 먹거리 전문가
현대사회에서 지식으로 성립되고 인정받는 데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의 설명은 언뜻 지식이 전근대 상황으로 되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게 현대의 지식이라고 한다면 주술사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향방을 제시했던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오늘날에는 지식을 위한 주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의 문제에서 영험한 능력을 부여받은 주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식체계가 상대적으로 수평화됐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특정 권한이 없는 이들도 얼마든 지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자유롭게 유통하거나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지식을 대하는 마음에 관한 전근대와 현대의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전근대의 지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도로 추상적이고 때로는 초현실적 세계를 다뤘다. 그에 따라 전근대의 지식에 대한 마음이라는 것 또한 현실과 괴리된 주술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현대의 지식에서 마음은 이성과 감성이 결합된 형태로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 중 하나가 ‘망탈리테’(Mentalit)다. 심성(心性) 또는 ‘사회적 마음’으로 번역하는 망탈리테는 블로크나 페브르와 같은 학자들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회의 특성을 살피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망탈리테는 감정이나 심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포함하는데, 말하자면 현실사회 안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복합물을 지칭한다. 이처럼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지 않고 현실에 발 딛고 있다는 점에서 망탈리테는 오늘날 지식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마음을 살피는 데 적합해 보인다.
특히 먹는 것, 먹거리와 관련된 지식의 경우 뒤에 숨은 망탈리테를 한층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먹거리에 대한 지식은 우리 몸과 직결되고, ‘누구나 먹는다’는 보편적 사실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먹거리 파동이 야기한 사회적 파문이 컸던 것도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먹거리 지식은 멀리 동떨어진 고매한 지식이 아니라 일상과 사정거리가 짧은 실질적인 지식이기에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 기댈 수 있다.
결국 먹거리 지식이 가지는 특징을 이해한다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를 둘러싼 지식의 망탈리테가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관련 지식들의 참과 거짓을 따지기보다 특정 시점에서 특정 지식이 왜 부각됐는지, 어떤 반동적 의미를 가지는지, 나아가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마음에 흡족하면 좋은 거지
정이현의 단편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언젠가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먹을 때였다. 미스조가 젓가락질은 안 하고 자신이 키우는 거북이에 대해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거북이가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바나나 한 개를 까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우고 다음 바나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거북이가 과일을 먹는다고요?
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몸에 안 좋다고 주지 말라는 말들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만 주라는 말들도 있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몸에 덜 좋아도 마음에 흡족하면 그게 또 좋은 거지.

단편 속 인물인 ‘미스조’의 말은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을 드나드는 수많은 지식이 가지는 비밀을 넌지시 알려준다. 현대의 지식은 마음에 달린 일이라고, 그러니 무엇보다 마음을 살피는 게 우선이라고 말이다.
강보라 영상학 박사·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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