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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대학을 지켜야 ‘좋은’ 과학자 나온다”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 22명 배출 비결 분석한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등록 2016-10-12 11:09 수정 2020-05-02 19:28

노벨상 수상에 대한 한국 언론의 관심은 유난스럽다. 2000년대 중반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주요 후보에 올랐다. 그 뒤 10년 넘게 노벨상 발표 때마다 국내 언론들은 미리 써둔 ‘고은 노벨상 수상’ 기사 송고 준비를 관행처럼 하고 있을 정도다. 굳이 ‘유난스럽다’는 표현까지 쓴 까닭은 노벨상을 받을 만한 밑천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도 수상 가능성과 당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벨상 수상 경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에 받은 ‘노벨평화상’뿐이다.

정작 부러움의 눈길을 받은 것은 일본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에 이른다. 특히 과학 분야 수상자가 22명(문학상 2명·평화상 1명)이나 된다. 올해도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명예교수가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일본의 비결은 뭘까?

일본은 150년 전부터 과학기술 인재를 발굴했다. 신식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생들을 서양 곳곳에 보냈다.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40여 년 만에 꽃이 피었다. 1900년에는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부신’에서 화학물질 ‘아드레날린’을 분해하는 세계적 발명을 했다. 이듬해 제1회 노벨생리의학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자도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였다. 그해 노벨상은 기타사토의 공동연구자였던 독일인 에밀 아돌프 폰 베링이 ‘디프테리아(급성 호흡기 감염병의 일종)에 대한 혈청 요법 연구’로 받았다. 그러나 (고토 히데키 지음, 부키 펴냄)에서는 당시 “디프테리아 연구에서 기타사토와 베링의 역할이 대등했다. 오히려 이전의 업적을 고려하면 기타사토가 우위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기초과학기술에 공들인 지 100년쯤 되자 투자는 열매를 맺었다. 일본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첫 노벨상을 받은 게 1949년이다. 유카와는 핵력(원자핵 안의 양성자와 중성자 등이 결합하는 힘)의 숨은 비밀을 설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소립자 물리학’이라는 거대 과학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로켓과 견줄 수 있는 빅 프로젝트”로 평가받는다. 특히 유카와는 국외 유학을 한 적이 없는 ‘순수 국내파’였다. 1900년대 초 각 지방 ‘제국대학’(지금의 각 지역 국·공립대학)을 중심으로 기초과학기술에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성장한 것이다. 초기에는 도쿄대와 교토대를 중심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여럿 나왔다. 최근에는 나고야·도호쿠·홋카이도대 등 지방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면서 과학기술 거점을 전국적으로 넓히고 있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도 지원금을 받기 위해 단기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하다는 하소연이 곳곳에서 나온다. 장기적 지원을 얘기할 때조차 “우리나라 과학계에 노벨상이 없는 이유”를 말하는 게 현실이다. 글쓴이는 “2천 년에 걸친 서양의 오랜 전통이 살아 있는 (과학) 분야에서 개국 이래 불과 150년이 지난 변방의 아시아 국가(일본)가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과계는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일본에 희망을 줄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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