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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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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도 좋다 유사가족도 좋다

‘나-가족-관계’의 의미 곱씹게 하는 만화들
등록 2016-09-14 10:41 수정 2020-05-02 19:28
<바닷마을 다이어리> 책 표지

<바닷마을 다이어리> 책 표지

추석은 역시 가족. 설과 추석이면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들이 줄을 잇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며칠을 지낸다. 홀연히 해외로 떠나가는 이도 많지만 여전히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라는 구호가 곳곳에 번득인다. TV를 켜면 프로그램마다 가족 이야기이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날을 보내는 풍경이 가득하다. 불만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인구 감소를 눈앞에 둔 한국의 현실에서 ‘가족’의 가치는 중요하니까.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힌 이들이 주로 가족을 외치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다만 가족을 반드시 다정하고 자상한 부모와 아이 하나 혹은 둘로만 생각하지 말자. 아이가 없거나 동성도 가능하고 혹은 부모 없이도 가능하다. 전혀 피를 나누지 않거나 사랑이 없어도 ‘유사가족’은 가능하다.

가족은 일종의 이상향

그러니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요시다 아키미의 를 펼쳐보자. 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각색한 영화로 봤을 수도 있다. 영화가 좋았다면 원작에서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혹시 심심했다면, 각색에서 빠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찬찬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막내인 스즈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2시간 남짓의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넘친다. 만화는 세세하게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그린다. 자진하여 부모가 떠나가고, 세 자매가 네 자매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풍경을 잔잔하면서도 가슴 벅차게 그려낸다.

가마쿠라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세 자매 사치, 요시노, 치카.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일찌감치 사라졌고, 어머니는 재혼해 혼자 떠나갔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크게 부족할 것 없이 생활하던 세 자매에게 아버지의 부고가 날아온다. 재혼한 아버지는 그녀가 죽은 뒤, 다시 재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의 딸인 스즈는 이제 핏줄도 섞이지 않은 새어머니와 살아야만 한다. 사치는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의한다.

부모는 그들을 버렸다. 속된 말로 하자면 그렇다. 셋째인 치카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사춘기였던 사치는 그를 증오한다.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린 남자로. 하지만 결국은 용서해준다. 아버지는 정이 많아 우유부단했고, 여기저기 상처를 주기만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남자였다고. 어머니는 제멋대로이고 무엇에도 책임지기 싫어했다. 아버지를 증오하다가도,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기는 너무 힘들어 금방 떠나가버렸다. 다른 남자에게로. 부모는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그들도 그저 나약한 인간이다. 때로 도망치기도 하고, 자주 울기도 하면서 어딘가에 매달리기도 하는.

요시다 아키미는 등 순정만화이면서도 강하고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기를 끌었던 작가다. 그런데 는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다정하게 이야기 속의 모든 이들을 끌어안는다. 인간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

노력해야 튼튼해지는 관계

하지만 그가 그리는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고도 안타깝다. 스즈가 선수로 뛰는 축구팀에는 병 때문에 다리를 절단한 친구가 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축구는커녕 제대로 걷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된 아이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사치는 유부남과 불륜관계에 있다. 바람을 피운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지금 자신은 누군가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인간은 잘못을 거듭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면서 자신을 방기하기도 한다. 요시다 아키미는 그들을 결코 동정하거나 힐난하지 않는다.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이 엮여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가족이란 한 번의 인연이 결정짓는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서로를 지켜보면서 맺어지고 튼튼해지는 관계라고.

가족이란 결코 쉽게 만들 것은 아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저지르는 것이 낫기는 하겠지만 그저 한번 해보기에 가족이란 틀은 너무 방대하고 가변적이다. 부담스럽고 겁이 난다. 그때 야마모토 나오키의 를 탐독해보자. 처음으로 국내에 작품이 출간된 야마모토 나오키는 성인만화의 거장이다. 성인만화라고 그냥 야한가보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지 말자. 섹스를 중심으로 현대인의 부유하는 일상을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에 야한 것은 맞다. 아주 야하다. 인간에게 섹스는 무엇인지, 인간의 마음에 섹스는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청년지에 작품을 발표했고, 모리야마 토라는 필명으로는 에로망가를 그렸다. 더 야한, 오로지 성적인 자극을 위한 에로망가는 포르노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야마모토는 1984년 본명과 필명으로 동시에 데뷔했고, 1980년대에는 등 에로망가를 주로 그리며 활동했고, 1990년대에는 본명으로 등 청년만화를 그리며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단편집 에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일본 젊은이들의 나른한 풍경이 그려진다. 경제 거품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지나온 세대의 이야기다. 더 이상 미래의 희망은 존재하지 않고, 여전히 풍요롭기는 하지만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완성되지도 않을 영화를 찍겠다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이야기도 있고, 대학 4년간 원거리 연애를 하던 연인이 정작 도쿄에서 함께 살게 되자 알 수 없는 거리를 느끼는가 하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히키코모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자살하는 사건도 있다. 약혼자를 버리고 도쿄에 가서 사업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잠시 고향에 돌아온 여인도 있고, 아르바이트할 때 몸을 몇 번 섞었던 여인이 결혼하고는 문득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가족’을 믿지 않는 그들
만화책 <우리집>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만화책 <우리집>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도 확실하지가 않다.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도 불투명하다. 결혼을 해도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라는 불안이 있다.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나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곳으로 기껏 가보았는데, 그곳 역시 모래성이었다. ‘꿈이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이 있을지도 모른다, 는 악몽.’(전망대) 그래서 누구는 쾌락에 빠지고, 누구는 자신 안에 침잠하고, 누구는 미쳐버린다. 그것들 모두가 담담한 세상의 일이다. 직접 나에게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좋으니까. 그런 무관심을 알기에,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조차 믿을 수가 없다. 이건 누군가에게 몽롱한 꿈일 테니까. 야마모토 나오키는 지극히 사실적인 그림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아찔하게 넘나드는 순간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주로 섹스를 통해서, 섹스의 비일상적인 냄새를 통해서.

에는 가족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를 관통한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라는 보호막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내몰고 파괴하는, 혹은 스스로 붕괴하는 가족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는 과거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끔찍해도 가족이라는 환상을 믿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진심을 믿는 것. 사이바라 리에코의 을 읽어보자. 폭력과 매춘과 죽음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지지리도 못사는 동네에서 자라는 아이들. 가족이 오히려 원수가 되고, 정상적으로 사회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성장하고 바로 곁에 있던 누군가는 어이없게 죽어간다. 끔찍한데 그게 현실이다. 은 픽션이지만, 사이바라의 어린 시절이 원재료로 들어가 있다. 자전적인 와 를 보면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1960년생인 야마모토 나오키와 1964년생인 사이바라 리에코는 동세대다. 그들이 그리는 세계는 10년, 20년이 아니라 영겁의 세월만큼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동화 같은 필치로 그려내는 의 세계는 의 청년들이 가까스로 도망쳐온 과거다. 여전히 그들의 꿈속에 존재하는 악몽 같은 것이다. 는 사이바라가 도쿄의 미대에 진학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고 술집에서 일하는 등 온갖 경험을 쌓으며 만화가가 되는 이야기다. 도박만화를 그리며 실제 경험이 필요하다고 파친코와 마작에 빠져 거액을 탕진하기도 했던 사이바라는 인생의 고통과 분노를 개그로 풀어낼 줄 아는 작가다. 그리고 웃음보다 더욱 진하게 감동이 남는다. 사이바라의 만화를 읽고 나면 한숨과 함께 그의 인생이 얼마나 가혹하면서도 벅찬 것임을 알게 된다. 인생은 늘 희극과 비극이 함께 온다. 담담하게 웃으며 자신의 비극을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필요한 건 가족보다 자신

결국 필요한 것은, 가족보다 자신이다. 자신을 되찾는 것.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영화 의 할리퀸은 원래 조커와 함께 등장하는 조역이었다. 할리 퀸젤은 조커와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였다가 오히려 유혹에 넘어가 ‘미친년’인 할리퀸이 된 캐릭터다. 조커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사랑을 갈구하는 수동적인 캐릭터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할리퀸은 조커를 박차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여성이 되었다. 남성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좌충우돌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악착같이 찾아가는 여성. 할리퀸은 남성의 곁을 지키는 조역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성장했고, 영화 를 그나마 성공시킨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만다 코너와 지미 팔미오티가 쓰고 채드 하딘이 그린 을 보면 그녀가 왜 21세기의 아이콘이자 맹렬한 걸크러시(girl crush)가 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물론 영화에서 할리퀸을 연기한 마고 로비를 떠올리며 봐도 좋다.

가족이라는 틀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 그리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나가는지에 의해서도 삶의 질이 결정된다. 가족이 없어도 유사가족을 만들 수 있고, 명절에도 혼자만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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