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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박근혜 비유집’

정부가 누락한 대통령 발언들과 시민 반응, 신조어를 모아 재편집… 낙인찍히고, 왜곡되고, 의미가 뒤틀린 박근혜 시대 ‘말의 수난’
등록 2016-03-10 10:15 수정 2020-05-02 19:28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 비유를 담은 가 2월25일 발간(취임 3년 기념)됐다. ‘어록집’이 아닌 ‘비유집’을 낸 대통령은 처음이라고 정부는 밝혔다.
“대통령의 비유 표현을 모은 책자 발간을 통해 국민과의 정책 공감대를 넓히고자 하는 노력은 역대 정부에서는 시도된 적이 없다”고 의미 부여했다. 박 대통령이 창조한 사자성어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은 공무원들의 회의 석상에서 인용되고, ‘창가문답’(창조경제의 가시적 성과는 문화융성에 답이 있다)은 문화체육관광부 직원들의 건배사로 이용되고 있다”는 설명도 붙였다.
‘박근혜 비유집’(106쪽 분량)은 11개 분야에서 40개 정책을 다룬다. 선별된 총 155개의 비유는 ‘편집’이 작용한 결과다. 비유·발언의 선택과 누락엔 부각하거나 잊히게 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비유집이 제외한 대통령의 발언들과 시민들의 반응, 시민들의 신조어를 붙여 재편집했다. 여기 ‘다시 쓰는 박근혜 비유집’이 있다. _편집자

배려와 진심?  “박근혜 대통령이 비유나 신조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대중적인 언어로 정책의 본질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듣는 사람의 기분과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와 하고픈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진심’의 결과가 비유와 신조어 사용의 이유인 것이다.”(머리글)

‘찌르고 낙인찍는’ 배려와 진심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 선택  비유집 제목이기도 한 이 발언은 2015년 12월16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나왔다. “엄격한 환경규제와 입지규제로 부지 증설을 할 수 없다”는 “식품 전문기업 A사”의 건의를 수용하면서 한 말이다. A사는 “경기도 이천시에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을 설립하고 수백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체결한” 회사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 직후인 지난 2월16일 국회를 찾아 특별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 직후인 지난 2월16일 국회를 찾아 특별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 대통령의 발언 맥락은 이랬다. “그런 것(환경규제)은 융통성 있게 해야지, 그런 말이 있잖아요.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 …그게(오염방지 시설이)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면 어떤 혜택이나 편의를 봐줘서 꼭 그렇게(건의대로) 이뤄졌으면 합니다. 꼭 좀 되도록 해보시죠.” 지역민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칠 영리기업의 민원을 해결해주면서 박 대통령은 ‘배려’와 ‘진심’을 담아 비유했다.

말의 비수  “일자리 창출과 투자 가로막는 규제들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겠다.”  (누락  2014년 11월25일 국무회의) 규제 철폐 드라이브를 걸 때 대통령의 비유는 극도로 살벌해졌다. 배려와 진심은 감지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이고 “쳐부술 원수”며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다는 암덩어리”( 선택 2014년 3월10일 제3차 수석비서관회의)가 됐다. “불독보다 진돗개가 더 한번 물면 안 놓는다고 해요. 그래서 진돗개를 하나 딱 그려놓으시고….”( 선택  2014년 2월5일 국정평가 종합분야 업무보고)

말의 칼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가슴으로도 날아가 꽂혔다. “일단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려내야 할 규제만 살려두도록 전면 재검토하겠다.”(누락 2016년 2월17일 무역투자진흥회의) 세월호는 규제가 작동하지 않아 침몰했다.

참사 1년 전 박 대통령은 비유했었다. “제때에 꿰매는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을 던다는 속담이 있죠? 아홉 바늘 꿰매도 제대로 안 됩니다. 사람 다 죽고 난 다음에는. 그러니까 우리는 어쨌든 선제적으로 예방한다, 그러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느냐, 사고 났을 때 드는 비용은 그것의 수천 배예요.”( 선택  2013년 3월4일 제2차 수석비서관회의)

말의 편향  “법은 약자들한테 엄마의 품 같은 그런 게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선택  2016년 1월26일 정부업무보고) 엄마의 품은 자식들을 차별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8월15일 최태원 SK 회장을 특별사면(횡령·배임) 했다. 제1차 민중총궐기(2015년 11월14일) 참여자들을 향해선 테러리스트(11월24일 국무회의)에 빗댔다. “IS(이슬람국가)도 지금 얼굴을 감추고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누락  이날 고령의 농민 백남기(69)씨는 경찰 물대포에 맞아 죽음의 경계로 던져졌다.

박 대통령은 특정 계층(노동자)의 희생만을 요구했다. “노동개혁은 우리 청년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만큼 어떤 이유로도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략적 흥정이나 거래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선택  2015년 12월23일 핵심개혁과제 점검회의) 노동시장 편입을 꿈꾸는 청년들을 동원해 기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노동유연화를 밀어붙여 달성하겠다던 청년 고용은 재계의 ‘노력’과 ‘자율’에 맡겼다. 새누리당의 ‘노동시장 선진화 법안’은 비정규직 사용 기한을 연장(2년→4년)하고 파견 직종을 전면 확대했다. 노동자가 된 청년들을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으로 옭아매는 함정에 가뒀다. 청년들은 “역겨운 위선”(2015년 9월16일 청년·학생 기자회견)이라며 냉소했다.

말의 낙인  “댐의 수위가 높아지면 작은 균열에도 무너져내리게 됩니다.”(누락  2016년 2월16일 국회 특별연설) 개성공단 폐쇄와 테러방지법 처리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며 그는 전 국민의 ‘의견 통일’을 강조했다. “북한의 도발로 긴장의 수위가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는데 우리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의 존립도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국가비상사태’나 ‘경제비상사태’란 말을 반복 사용했다.

그는 “불타는 애국심”(누락 2014년 3월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을 요구하며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세월호 진상 규명 촉구도 그 틀에서 바라봤다. “세월호 특별법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 없어야 한다.”(누락  2014년 9월16일 국무회의)

세월호 1주기 현안점검회의 땐 ‘간첩 신고’를 주문했다. “간첩도 국민이 대개 신고를 했듯이 우리 국민들 모두가 정부부터 해가지고 안전을 지키자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신고 열심히 하고.”누락  박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국민’(지지 세력)과 ‘비국민’(비판 세력)을 쪼갰다. 비국민을 배제하고 국민을 결집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해왔다.

정의(正義)의 재정의(定義)

말의 재정의  “(총선에서)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누락  2015년 11월10일 국무회의) 현 정부는 정의(正義) 자체를 재정의(定義)하고 있다. 비판은 ‘종북’으로 재정의하고, 비판 세력은 ‘반국가 세력’으로 재정의하며, 차이는 ‘위험’으로 재정의한다.

지난해 12월19일 열린 제3차 민중총궐기 ‘소요문화제’에서 한 참가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풍자한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지난해 12월19일 열린 제3차 민중총궐기 ‘소요문화제’에서 한 참가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풍자한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진실한 사람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한결같은 사람”으로 재정의됐다.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유승민 의원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주셔야 할 것입니다.”(누락  2015년 6월25일 국무회의) 박 대통령의 배려와 진심은 그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졌다.

대통령을 향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진실’의 정의가 재정의되면서 총선에 나선 새누리당 후보들마다 ‘진실된 사람’을 자칭·참칭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진박(진짜 친박), 맹박(맹종하는 친박), 원박(원조 친박), 신박(새 친박), 복박(돌아온 친박), 월박(친박으로 갈아탄 비박), 강박(강성 친박), 멀박(멀어진 친박), 홀박(홀대받는 친박), 짤박(짤린 친박)…. ‘친박 용어’의 끝없는 분화는 박 대통령이 만든 언어의 카오스다. 재정의의 최대 오류는 그 자신을 놓고 저질러졌다. ‘신뢰의 정치인’.

말의 추락  “그러면 경제민주화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가. 그 궁극적 목표는 대기업부터 중견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선택  2013년 5월15일 언론사 정치부장단 만찬) 가장 대표적 ‘공약 파기’로 꼽히는 경제민주화 발언을 비유집에 넣은 것도 말의 추락을 부추긴다.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할 발언들이 비유집 곳곳에 배치돼 있다.

“그동안 우리가 구조적인 문제들을 풀지 못한 이유는 원인과 해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선택  2014년 2월10일 제2차 수석비서관회의) 그가 ‘신뢰의 정치인’이란 정의(定義)를 붙들고 있는 동안 말의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책상을 열 번 내리치며 “어떤 나라에도 있을 수 없는 기괴한 행위”라고 비난한 필리버스터(국회 무제한토론)도 그의 약속(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제19대 총선 정책공약집’)이었다. 그는 ‘망각의 정치인’이다.

말의 오염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 혼이 빠진 인간이고 또 역사를 잘못 알고 이상하게 왜곡돼서 그게 진리인 줄 알고 돌아다니는 것은 영혼이 썩는 거죠.”(선택  2015년 10월13일 제15차 수석비서관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압박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 자신의 말을 스스로 부정하며 그 ‘정치적 의도’를 입증한다. “역사는 정말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면 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될 리도 없고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될 것이다.”(2004년 8월20일)

말에 무책임한 대통령은 언어의 오용과 가치의 전도를 일으켰다. ‘국정교과서’의 부정적 뉘앙스를 희석시킨다며 새누리당 의원들은 ‘바른 교과서’나 ‘균형 교과서’란 표현으로 여론전을 펼쳤다.

말의 자화상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 그리고 꿈은 이루어진다.”(선택  2015년 5월5일 어린이날 꿈나들이) “대통령이 꿈”이라는 한 초등학생에게 들려준 말이다. 비유집엔 빠진 문장이 본래 발언에 있다.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편안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다가 대통령까지 됐다.”누락 

불투명한 현실에 짓눌린 청년들은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그의 발언에 반발했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주가 도와줄 만큼 ‘노오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조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은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지 모르나, 정규직이 되고(비정규직 사용기한 연장), 해고되지 않고 일하며(쉬운 해고 낳는 취업규칙 변경),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알고 싶은 바람(특별조사위원회 무력화)은 정부가 나서서 방해한다.

“멘토가 가난을 구한다.”(선택  2013년 3월25일 산업통상자원부·중소기업청 업무보고) ‘멘토 박근혜’는 청년들에게 조언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느냐 중동에 갔다고.”(누락  2015년 3월19일 제7차 무역투자진흥회의) “한국 사람에게 돌아다니고 개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DNA가 있나봅니다.”(선택  2014년 9월4일 에너지산업 대토론회) ‘헬조선’에서 ‘흙수저’로 사느니 ‘탈조선’하거나 ‘죽창’을 들어야 한다는 말들이 ‘노오력’을 강조하는 박근혜 시대 ‘언어의 자화상’이다.

말의 ‘정략적 유포’에 맞선 ‘저항적 생성’

말의 저항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도 그 도를 넘고 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다.”(누락  2014년 9월16일 국무회의) 박 대통령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국가와 국민에 대한 모독’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권력은 언어의 선택과 누락에 전략을 담는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은 용어를 갖지 못하고, 용어를 갖지 못한 것들은 말해지지 않는다. ‘말의 정략적 유포’에 맞선 ‘말의 저항적 생성’이 있다. ‘마리 안통하네뜨’(불통), ‘참죠경제’(경제 분야 공약 파기), ‘아몰랑’(무책임), ‘걱정원’(국가정보원 정치 개입), ‘박근혜 번역기’와 ‘근혜체’(이해 불가 화법) 등으로 시민들은 대통령과 그의 정부를 희화화한다. 정치권력이 생산하는 언어의 틈 사이에서 자기 말을 갖기 위한 ‘쟁투’가 끊이지 않는다.

비유집의 ‘머리글’은 조지 레이코프의 를 끌어들여 이렇게 썼다. “조지 레이코프는 은유의 힘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바 있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인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적 기제이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영향력 그 자체’라면서 은유의 놀라운 힘을 강조했다.”

같은 책엔 이런 소제목의 글도 있다. “은유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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