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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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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삶

등록 2015-12-19 05:43 수정 2020-05-02 19: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꿈이다. 이름, 국적, 성별, 출신학교, 경제적 배경, 가족 등 신원의 두꺼워진 껍데기를 떠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인류에만 속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오랫동안 거주하던 자신의 장소를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삶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인물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많은 이야기에서 반복해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도시 사람들에게 탈출과 정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어떨까. 더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은 답은 아마 ‘정주’일 것이다. 기본적인 거주 조건이 눈에 띄게 불안해진 탓이다. 거주 비용이 급등하고 타의에 의해 무시로 삶의 뿌리가 뽑혀나가는 지금은, 자신의 장소를 갖는 일이 하나의 꿈이 되었다.

새로운 장소는 있는가

전세난으로 서울 인구가 4년째 줄어 28년 만에 1천만 인구 시대가 끝나고 있다고 한다. 영국 런던과 홍콩에서는 터무니없이 치솟은 임대료 때문에 보트나 헛간에서 살거나 차라리 비행기를 타고 출근한다는 희극적인 뉴스가 쏟아진다. 최근 미국 뉴욕이 유례없이 낮은 범죄율을 기록하고 예술과 문화계에 활기가 넘치는 등 부흥기를 맞게 된 이유가 실은 도시 중심에 소수의 백인 고소득자들이 몰려들어 원주민을 몰아냈기 때문이라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주택난에 대한 자조적 진단이 나온다.

이쯤 되면 내가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구석에, 초라할지라도 지붕과 벽이 있는 방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나는 도시를 걸으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저 비싼 집을 그렇게 많은 빚을 내서 사고 빌리며,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지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얼마나 순종적인 거주자들인가. 탈출도 망명도 하지 않고 폭동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살게만 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지 않은가.

순순한 부족민들의 바람과 달리 지도 위에는 점점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뉴욕의 어떤 이들은 지하로 밀려나 두더지처럼 터널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들은 금융위기로 건설이 중단된 45층의 초고층 빈 건물을 무단 점거했다. ‘토레 다비드’로 불리는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실험적 주거 공동체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도시 한복판에 골조와 계단과 수많은 창의 구멍을 드러낸 채 그로테스크하게 서 있는 이 거대한 콘크리트는, 제자리에서 뿌리 뽑힌 유령들이 한데 모여 붕 떠 있는, 대도시의 내부를 잘라다놓은 슬픈 상징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제 정주에 실패했으며 계속해서 실패할 것임을 알게 된 어떤 거주자들은 지도에 없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선다.

‘리버랜드’는 지난 4월 만들어진 신생 초소형 국가다. ‘제3자가 무인 지대에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국제법을 근거로 체코의 자유시민당 당원인 비트 예들리치카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사이 영토 분쟁 중인 무인 지대에 세웠다. 면적은 6km². 직접민주주의 체제에, 세금은 내고 싶은 만큼만 낸다. 범죄 전과가 없고 나치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등 극단주의자가 아니면 누구나 국민이 될 수 있다. 이미 30만 명 이상이 국민이 되겠다고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국가나 행성이 아니라도

인류 최초의 화성 정착 프로젝트인 ‘마스원 프로젝트’는 어떤가. 화성으로 가는 이 ‘편도’ 여행에 전세계 20만 명이 신청했다. 여기서, 돌아오는 다리를 불태우면서까지 ‘새로운 삶’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절망 혹은 희망을 보는 것은 과장일까.

물론 리버랜드와 마스원 프로젝트의 현실적 한계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전세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 불가능한 장소에 손을 뻗었다는 사실이다. 지도에 없는 곳이 꼭 국가나 행성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곳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계없이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어떤 태도, 장소가 아닌 곳에 머무는 삶의 다른 방식으로도 이를 수 있는 곳이라고 믿는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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