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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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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수는 없다

<후쿠야당 딸들>
등록 2015-11-28 09:08 수정 2020-05-02 19:28

“언니들은 지나갔다고 잊었겠지. 하지만 지금 나는 아프다고. 정말 아프다고.”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 여동생이 볼거리에 걸렸다. 전염병이라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끙끙 앓는다. 지독하게 아픈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첫사랑 남자애가 먼 도시로 전학을 가는데 그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 몸도 마음도 엉망인데, 언니들은 과자나 먹으며 뻔한 위로를 던진다. 지나가면 다 괜찮아진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많은 일들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일 때는 더욱 그렇다. 급성유행성 전염병처럼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 별다른 치료법도 없이 끙끙 앓아야 하는 것. 또 걸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는 것. 그런 일들이 태반이고, 사랑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반복된다고 해도, 지나간다고 해도 겪는 순간은 아프고 뜨겁다.

후쿠야당은 일본 교토의 오래된 전통과자점이다. 450년 동안 과자점을 물려받아 지켜온 이 집안에는 세 명의 딸이 있다.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교양 있는 모범생으로 자란 장녀, 집안 망신만 시키는 망나니지만 결국 과자점을 물려받는 둘째, 평범한 듯 보이나 꼿꼿한 주관을 가지고 성장해나가는 막내. 만화 (유치 야요미 글·그림)은 이 과자점을 배경으로 세 딸이 겪는 사랑을 그린다.

사랑의 참고도서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순정만화를 안 다룰 수 있을까. 순정만화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바는 이해하지만, 자신이 연애를 잘 못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꼭 명작 순정만화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남녀 대화의 기술 같은 거 배울 필요 없이, 훨씬 더 좋은 처방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순정만화는 뜻 그대로 순수하게 감정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부터, 변하고 퇴색하고 왜곡되기 마련인 타인의 감정까지. 그 결을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이루어보려는 장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감히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전진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더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각 개인의 의지. 에서 과자점이 큰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그 긴 세월을 견딘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사람들이 각자가 당면하는 사랑에 씩씩하게 맞서는 이야기가 주는 단단한 미덕이 있다. 그래서 그림체가 아무리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읽고 나면 마음속에 어떤 따뜻함이 피어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씨앗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랑 그 자체가 소재로 많이 다뤄지고, 연애도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듯하다. 사랑의 참고도서를 쓰겠다고 한 데는 그런 유행에 업혀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쓰다보니 깨닫는다. 사랑의 기술, 사랑의 고수 같은 건 없다. 다만 내가 지금 겪는 아픔과 기쁨에 생생하게 대응하는 것.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참고도서가 그 최선에 다가가려는 노력에 조금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사랑의 참고도서’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님과 ‘사랑의 참고도서’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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