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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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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계의 전제군주, 블렌더

천부적 후각으로 술맛을 유지·창조하는 장인 ‘블렌더’… 술을 위해 살지만 술에 취해서는 안 되는 ‘형벌’에 처해진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네
등록 2015-08-25 11:19 수정 2020-05-02 19:28

신이 있어 특별히 쓰다듬었구나 하는 재능이 있다. 만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 ‘절대’ 또는 ‘천부’라는 최상급의 수사를 붙일 수 있는 미각, 음감, 후각 등을 타고난 사람들. 그중 위스키 산업과 관련이 있는 것은 후각(미각이 아니라)이다. 직업상 ‘블렌더’라는 분야에서 그 재능이 발휘된다.

수천 가지의 향을 감별할 수 있는 후각을 선사받은 블렌더는 조그만 튤립 형태의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다만 코로 맛보며 평범한 이의 일상에 윤기를 불어넣어줄 술의 심포니를 구상한다. 김명렬

수천 가지의 향을 감별할 수 있는 후각을 선사받은 블렌더는 조그만 튤립 형태의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다만 코로 맛보며 평범한 이의 일상에 윤기를 불어넣어줄 술의 심포니를 구상한다. 김명렬

블렌더. 말 그대로 술과 술을 ‘섞어’ 새로운 술맛을 창조하는 직업이다. 위스키의 큰 두 종류를 음악에 빗대자면, 싱글몰트는 솔리스트, 블렌디드 위스키는 심포니에 비유하는데, 블렌더가 하는 일은 싱글몰트 솔리스트의 연주를 항상 동일한 수준을 유지하게끔 관리·감독하는 한편으로 블렌디드 심포니의 악보를 쓰고, 공연을 위한 솔리스트를 엄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지휘까지 맡아 맛의 앙상블을 창조하는 것이다. 위스키계의 슈퍼 재능이자 전제군주, 그가 바로 블렌더다.

위스키 각 회사에는 단 한 사람의 마스터(치프라고도 한다) 블렌더만 존재한다. 종신 직업인 그의 사후, 또는 사고 등으로 인한 갑작스런 은퇴에 대비해 젊은 어시스트 블렌더 한 사람을 옆에 두긴 하지만, 그 또한 마스터 블렌더의 혈통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화이트앤드매케이사의 현 마스터 블렌더는 역시 마스터 블렌더였던 조부로부터 8살 때부터 블렌딩을 훈련받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세습되는 재능이자 권력으로, 위스키 회사의 사장은 잘릴 수 있어도 마스터 블렌더가 잘리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근대 이후 위스키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마스터 블렌더들도 사운과 명예를 걸고 수많은 명품을 발표해왔다. 그중 1937년 첫선을 보인 걸작 발렌타인 17년을 뜯어보면, 우선 블렌딩에 쓰인 위스키의 종류가 물경 마흔넷(몰트 40, 글레인 4)으로 일반적인 블렌디드 위스키가 15~20가지를 사용하는 것을 훨씬 상회하는 대편성의 심포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1바이올린과 건반(키몰트라고 부른다. 건축에 비유하면 개성이 밋밋한 글레인으로 조성한 부지 위에 집의 뼈대를 이루는 기둥에 해당된다)으로 선택된 것이 글렌버기와 밀튼더프, 그 뒤를 스카파, 플투니 등등의 몰트가 든든히 받쳐준다. 아드벡과 라프로익은 1% 미만으로 쓰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등장하며 전체 연주에 깊은 인상을 부여한다.

블렌딩을 음악에 비유했지만,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음악의 악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돼 있지만, 블렌딩의 레시피는 문외불출, 특급비밀로 분류돼 절대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권력에는 당연히 큰 책임이 따른다. 블렌더도 예외일 수 없다. 블렌더의 일과를 들여다보면, 몸의 컨디션이 가장 좋은 오전 중에 대략 300~400가지의 위스키, 즉 이제 갓 증류된 원액을 비롯해 많게는 100만 개가 넘는 저장창고의 술통(캐스크)에서 매일매일 보내져오는 샘플링을 코로 테이스팅(노이징)하며, 블렌딩에 적합한 캐스크의 선별과 그 타이밍을 결정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혀로 맛보지 않는데, 혀에 맛의 기억이 남아 다음 테이스팅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숙련된 블렌더의 경우 대략 3천~4천 종류의 향을 구별할 수 있는데, 개중에는 60억 인구가 있으면 60억 종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호언하는 이도 있다. 그건 좀 과장이라고 해도 이제 막 증류된 위스키 원액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식물의 꽃향기를 맡아, 머더워터(mother water)로 쓰이는 스페이사이드의 지류를 탐사한 결과, 그 식물 몇 뿌리를 발견해 보호하게 되었다는 등, 블렌더의 천부적 후각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후각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탓에 블렌더에게는 금기가 많다. 향수, 담배는 물론이고 마늘, 카레 등 자극적인 음식도 피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술 마시는 것이 금물이다. 술의 맛을 창조하는 재능을 부여받은 이가 그 선택된 재능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술에 취해서는 안 되는 ‘형벌’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범부는 김연아가 되는 것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운 연기를 바라보는 것이 더 즐겁고, 만에 한 명의 후각을 받아 블렌더가 되기보다는 그가 만들어준 맛있는 술을 맘껏 마시는 것이 더욱 행복한 편인 듯도 하다.

김명렬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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