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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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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입에 문 제비야, 날자 날자 날자꾸나

서울 상수동의 어엿한 랜드마크, 3주년 맞은 공연 중심의 복합문화공간 제비다방 또는 취한제비
등록 2015-05-01 12:56 수정 2020-05-02 19:28

누군가는 제비다방이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하면서 쓸쓸한 노래를 만들었다. 제비다방에서 늘 불러왔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힙합 비트 위에서 예술가의 고단한 밥벌이를 논하는 캐릭터도 있다. 그 밖에도 실패한 작업의 후일담부터 확고한 정치적 입장까지 이런저런 한담이 오고 간다. 최근 발매된 에 실린 수록곡에 관한 이야기로, 참여한 많은 뮤지션들은 노래를 통해 제비다방을 둘러싼 각각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지난 3년간 제비다방의 무대에 섰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며 필요한 작업을 구상하고 저녁이면 노래하거나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신다. 동료 뮤지션부터 각종 음악 관계자와 그들의 친구까지 다양한 인연을 얻고 술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한다. 제비다방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지난 4월18일 서울 서교동 레진코믹스 브이홀에서 열린 제비다방 3주년 컴필레이션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의 모습. 제비다방 제공

지난 4월18일 서울 서교동 레진코믹스 브이홀에서 열린 제비다방 3주년 컴필레이션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의 모습. 제비다방 제공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제비다방

올해로 3년 된 제비다방은 서울 마포구 상수역 근처의 3층짜리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과 지하는 아침 10시부터 카페로 운영되는데, 밤이면 ‘취한 제비’로 간판을 바꿔달고 공연장이 된다. 공연뿐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단편영화도 상영하고, 가끔 전시나 낭독회도 이루어진다. 위층에는 레이블과 잡지 편집실, 그리고 건축사무소를 두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을 아우르는 이름은 문화지형연구소 CTR로,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오상훈씨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그의 동생 오창훈씨가 같이 만들었다. 형제의 직업적 배경 덕분에 복합적이되 효율적인 공간 설계가 가능할 수 있었고, 공간을 둘러싼 거의 모든 텍스트에 ‘제비체’를 적용하는 등 핵심적인 디자인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비다방은 시인 이상이 1930년대 서울 종로에서 운영했던 다방 이름으로,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놀다가 2년 만에 문을 닫은 곳이다. 21세기 상수동 제비다방에서는 현재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점장 1명과 10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무탈한 운영을 자축할 만한 작품이 나왔다. 큰 공연장을 빌려 기념 공연까지 마쳤다.

제비다방을 비롯한 문화지형연구소 CTR의 순조로운 운영은 경험에 따른 결과다. 전신은 비슷한 성격으로 2005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열었던 복합문화공간 ‘레몬쌀롱’으로, 본업을 가진 공간의 책임자들이 수익을 돌려쓰면서 유지 가능성을 실험해봤다. 당시만 해도 서교동은 홍익대의 주변부였기 때문에 돈 걱정 덜 하고 각 분야 아티스트의 장기 프로젝트부터 단발성 전시에 이르기까지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었다. 공연도 재미 삼아 작게 시작했다. 노래를 나눌 줄 아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무대에 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공연이 끝나면 같이 술을 마셨다.

이름을 바꾸고 터를 바꾸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공연은 차차 구체성을 갖기 시작해 마침내 가장 성장한 분야가 됐다. 현재까지 제비다방의 공연은 무료 입장, 유료 퇴장의 자율모금제를 원칙으로 한다. 한때는 실현 가능성을 의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술과 대화를 곁들여 음악을 나누는 동안 음악을 들려주는 이들의 처지를 고민한 끝에 이같은 운영은 제비다방의 상징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

헐겁지만 매력적인 공연장

엄밀하게 말해 제비다방은 뛰어난 공연장이 아니다. 면적은 약 14평으로, 관객과 아티스트가 서로를 응시하기까지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할 만큼 좁다. 무대 역시 작고 엔지니어가 없어 사운드 세팅을 뮤지션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인원이 많거나 사운드에 엄청 공들이는 밴드라면 공연이 어렵다. 연주 도중 드럼이 흔들려 당황하는 뮤지션을 본 뒤 효율적인 배치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일은 제비다방의 운영 전반은 물론 섭외부터 진행까지 공연을 책임지는 점장의 업무다.

제비다방의 지하 공연장. 14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무료 입장, 유료 퇴장’ 공연이 이어진다(왼쪽). 이 공간에서 공연하고 있는 밴드 파블로프. 제비다방 제공, 이정연 기자

제비다방의 지하 공연장. 14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무료 입장, 유료 퇴장’ 공연이 이어진다(왼쪽). 이 공간에서 공연하고 있는 밴드 파블로프. 제비다방 제공, 이정연 기자

시설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고 한들 김간지X하헌진부터 위댄스까지 제비다방을 꾸준하게 맴도는 뮤지션은 적지 않다. 제비다방의 남다른 공연 원칙이 그들을 머물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 4회씩 딱 한 팀만 무대에 선다. 너무 늦게까지 큰 소리를 내면 민원이 들어온다는 정도의 지침만 따를 뿐, 시간에 대한 압박 없이 자신의 공연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다. 무대에서 긴장하고 땀 흘렸을 뮤지션에게 뒤풀이용으로 양주를 한 병 준다. 따라서 뮤지션은 공연이 끝난 뒤 굳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 없이 친구·동료와 함께 여운을 나눌 수 있다. 며칠 뒤에는 편집과 자막 작업을 마친 공연 영상이 제비다방의 마크를 달고 유튜브에 등록된다. 그렇게 저장되고 기록되는 영상은 공간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같이 나누는 자산이 된다.

최근 발매된 는 공연을 통해 제비다방과 인연을 맺은 뮤지션들의 합동 작품이다. 점장 장혜진씨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한 기획은 아니었다. 자주 공연하는 밴드 위댄스가 지난해 손님이 없는 시간에 제비다방에서 작업하면서 제비다방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얘길 했는데, 말이 번지기 시작하자 차차 더 많은 뮤지션이 붙었다. 위층에 바로 긴가민가레코드가 있으니 앨범 제작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4월1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브이홀에서 이루어진 앨범 발매 기념 공연에서 하헌진은 를 소개하면서 처음 부르는 노래라 실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안홍근은 예전에 써둔 노래를 이제야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됐다면서 을 들려줬고, 사이는 제비다방에서 늘 그래왔듯 를 노래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모두 컴필레이션 수록곡으로, 누군가는 신곡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익숙한 노래를 얹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노래에 실린 사연도 제각각이고 취하는 스타일 또한 천차만별이다. 참여한 뮤지션에게 앨범의 취지를 설명하긴 했지만 굳이 음악적 일관성을 요구하진 않았다. 제비다방을 경험하고 애착을 느끼는 뮤지션들의 단합만으로 앨범의 흐름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나는 앵벌이 뮤지션이다”

제비다방의 오랜 친구 김간지는 김힙합이라는 예명으로 컴필레이션에 참여해 를 들려준다. 전업 뮤지션의 직업적 비애와 철학을 담은 노래로, 제비다방에서 얻은 경험이 가사의 기둥이 됐다. 앵벌이는 김간지만 하는 게 아니다. 제비다방의 뮤지션들은 “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저기요, 돈 좀 주실래요. 이러면 좀 없어 보이나요” 같은 농담을 즐긴다.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을 가로지르며 최대한 불쌍한 노래를 불러 모금을 부추기는 뮤지션도 있다.
자율모금제에 익숙하지 않았던 운영 초반에는 달랑 6천원이 걷히는 날도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아티스트의 인기와 지지도에 따라 편차는 좀 있지만 최대 60만원까지 가져간다. 모금액은 전액 뮤지션에게 전달되는데, 제비다방은 이런 지급 방식이 공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창작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장혜진 점장은 최근 “돈 없으면 난 제비다방 안 간다”는 누군가의 트위터를 보고 좀 감동했다. “가장 예민한 문제를 자율에 맡기는데 아무도 무료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어요. 어떤 아티스트는 제비다방에서 공연하면 꽤 짭짤하다는 얘기도 해요. 음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양심에 맡기는 건데, 그걸 헤아려줄 수 있을 만큼 관객의 의식이 성장한 거예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은 제비다방을 두고 “익숙하지만 여전히 설레는 공간”이라 말한다. 하루에 한 팀만 공연하니 무대를 내 집이라 여기면서 평소에 못하던 공연을 마음껏 할 수 있고, 객석이 가까워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친밀한 소통이 가능하며, 낮에 찾아가면 자신을 떨리게 만드는 훌륭한 아티스트가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그렇다. 또 다른 단골 뮤지션 하헌진의 입장도 비슷하다. 좁은 만큼 가까워서 좋고, 위치가 좋고 친숙한 만큼 집에 가는 길에 별 고민 없이 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어른들의 놀이터가 되어가는 제비다방의 외관(왼쪽). 제비다방 바깥 벽에는 공연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제비다방 제공

예술가와 예술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어른들의 놀이터가 되어가는 제비다방의 외관(왼쪽). 제비다방 바깥 벽에는 공연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제비다방 제공

공간에 대한 애정은 관객도 마찬가지다. 제비다방을 자주 드나드는 직장인 김정미씨는 “근본적인 분위기는 꾸준하게 지켜지면서 조금씩 변하는 풍경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일정을 확인하고 직접 예매해 예정된 기대를 충족하는 검증된 공연과 달리 그냥 술 한잔하러 갔다가 생각지 않게 감동을 주는 공연을 접하는 바람에 기꺼이 주머니를 털게 된다는 것이다. 관객의 진솔한 반응은 아티스트에게 평소와는 다른 평안을 안겨준다. 이런 분위기라면 하던 걸 또 해도 상관없을 것 같고, 새로운 무대를 만든다고 해도 잃을 게 없다고 느낀다.
단골이 많고 사랑방 성격이 강한 까닭에 이른바 ‘진상’ 손님이 안 보이는 것도 제비다방의 귀여운 자부심이다. 좁은 만큼 위험할 수도 있는 공연장에서 아직 사고 한 번 없었고, 분위기에 취해 찾아온 관객에게 과감하게 맥주 한 잔씩 돌리는 사람은 봤어도 난동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3년을 근무한 장혜진 점장의 설명이다.

어른들의 음악 놀이터

결국 제비다방은 성숙한 어른들이 구축한 공간이다. 노래가 곧 삶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평가와 지원을 양심에 맡겼다. 그래서 때때로 손해가 따르기도 하는 비즈니스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공연이 없을 때도 제집처럼 찾아오는 뮤지션들을 얻었고 공간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특별한 노래도 얻었다. 한경록은 이라는 곡을 썼다. 전기성은 벌써부터 제비다방이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커피를 팔고 공연을 기획하지만 제비다방은 단순히 카페와 공연장으로 성격을 한정할 수 없다. 카페와 공연장의 구색을 갖추고, 생생하고 자발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이민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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