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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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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가둔 응접실

정성주 작가의 속물사회 3부작 <풍문으로 들었소>
감옥 같은 응접실 풍경이 전면화된 홈드라마, 서봄의 선택은
등록 2015-03-25 08:55 수정 2020-05-02 19:27

박경수 작가의 가 끝나자 그 후속작으로 정성주 작가의 가 도착했다. 드라마계에서 대한민국 특권층의 속성을 가장 잘 해부하는 두 작가가 이번엔 공통적으로 법조계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연이어 안방극장을 찾은 것이다. 먼저 박경수 작가는 부패한 검찰 수뇌부를 조명했던 를 끝마치면서 한 정치인의 패륜적 횡포를 다뤘던 , 자본의 무한 탐욕을 그렸던 과 더불어 대한민국 지배권력의 삼각구도를 탐구한 ‘권력 3부작’을 마무리지었다. 그렇다면 정성주 작가의 는 과 에 이어 계급사회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는 ‘속물사회 3부작’이라 부를 만하다.

박경수의 집무실, 정성주의 응접실

정성주 작가의 2012년 작 은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 대치동으로 이주한 주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남 중·상류층의 신분 상승 욕망과 허위의식을 꼬집었고, 2014년 작 는 클래식 음악을 이미지메이킹과 돈세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상류층의 위선과 부도덕을 비판했다. 현재 방영 중인 에서는 대한민국 상위 1%에 해당하는 초일류 상류층의 가식과 속물의식이 풍자 대상이다. 물론 이 일관된 작품세계의 근원을 찾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식계급의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풍자함으로써 작가 정성주, 연출 안판석 콤비 신화의 기초를 마련했던 2000년 드라마 도 만날 수 있다.

정성주 작가의 속물사회 3부작 중 〈풍문으로 들었소〉 는 가장 어린 여성이 주인공이다. 서봄(고아성·맨 오른쪽)이 공부에 재능을 보여서 세습사회의 근간을 흔들며 사건은 벌어진다. SBS 제공

정성주 작가의 속물사회 3부작 중 〈풍문으로 들었소〉 는 가장 어린 여성이 주인공이다. 서봄(고아성·맨 오른쪽)이 공부에 재능을 보여서 세습사회의 근간을 흔들며 사건은 벌어진다. SBS 제공

그럼에도 굳이 2010년대 부터를 속물사회 3부작으로 묶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더욱 심화된 계급 양극화의 현실을 폐쇄적인 밀실 이미지라는 유사한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어서다. 밀실은 박경수의 권력 3부작에서도 핵심 이미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특권계급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두 작가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박경수 작가의 밀실이 남성 위주의 공적 집무실로 표현되며 굳건한 제국의 성격을 지니는 것과 달리, 정성주 작가의 밀실은 주로 여성들을 제한된 조건 속에 가두는 사적 응접실의 풍경으로 나타나면서 감옥의 느낌에 더 가까워진다. 이를 통해 속물사회 3부작은 공고한 양극화 사회와 함께 ‘젠더’라는 또 하나의 계급체제를 동시에 비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에서 학벌계급사회라는 부조리한 풍경은 ‘대치동 엄마’라는 사적 응접실의 세계에 압축돼 있다. 이 세계는 국제중학교와 미국 상위 10개 보딩스쿨을 거쳐 아이비리그로 연결되는 초특급 엘리트 코스의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자식들을 생존시키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철저한 폐쇄사회다. 동시에 ‘대치동 엄마’들은 그 목표를 위해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의 삶’에도 갇혀 살아야 한다. “경쟁 대신 존중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던 윤서래(김희애)는 이 극단적 속물사회로 이주하고부터 ‘아내의 자격’만을 강요받으면서 이중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서민이자 어린 여성이라는 굴레

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예술재단이라는 공적 집무실을 배경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재단을 돈세탁 도구로 이용하는 서한그룹 서 회장(김용건) 일가의 마작 게임룸과 같은 사적 응접실이 중심이다. 우아한 재단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의 주 업무 또한 그들의 특권적 세계에 기생하려 온갖 비리를 수습하는 ‘고급 하녀’ 역할에 불과하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여성으로서의 욕망도 거세하며 살아가는 혜원은 그 폐쇄적 속물사회의 창에 갇힌 노예와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는 아예 사적 응접실의 풍경이 전면화된 홈드라마다. 대한민국 최상류층 한정호(유준상)의 집은 ‘초일류계급’의 폐쇄성만큼이나 겹겹의 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감옥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인물들은 계급에 따라 철저히 구획된 방에서 거주한다. 그 안에서 인상(이준)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아이를 낳은 순간 감금당하다시피 하며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살아야 했던 서봄(고아성)의 상황은 서민 계층이자 어린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드러낸다.

속물사회 3부작이 근본적으로 밀실의 여성들이 바깥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이야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 탈주는 억압된 상태로도 갑의 일원으로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속물적 욕망을 포기하고 힘겨운 길이 펼쳐지더라도 ‘인간의 자격’을 획득할 것인가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은 ‘조건 좋은 남편에게 슬쩍 묻어서 편하게 살아가려던’ 서래가 그 안주의 일상을 탈출하는 선택의 결말로 끝이 났다. 그로 인해 ‘대치동 사모님’에서 식당 도우미로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지만 서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고 느끼며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선택은 기존 세계가 상류사회에 속할수록 더욱 힘겨워진다. 그래서 에서 노예의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혜원의 싸움은 거의 사투와도 같이 그려졌다. 혜원은 한때 자신이 꿈꿨던 순수한 청춘의 표상 이선재(유아인)를 만난 뒤부터 자신이 속물사회의 감옥에 갇힌 존재라는 걸 깨닫고 스스로도 공범이었던 서한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며 양심을 되찾는다. 죄의 대가로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오히려 그 밀실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혜원의 역설적 결말은 에 이어 이 속물사회 3부작이 결국 인간의 존엄 회복에 대한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서봄은 어떻게 자유를 찾을까

에서 특히 서봄의 행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작품의 세계는 3부작 가운데 제일 높은 상류사회에 속해 있으나 서봄 역시 3부작 주인공 가운데 제일 어리고 순수하다. 아직 속물적 욕망에 물들지 않은 서봄이 그 순수한 외부인의 시선으로 특권적 세계의 근원에 대해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어쩌다 이렇게 큰 집에 살게 됐냐”는 서봄의 물음과 그에 대해 “몰라. 태어나보니까 이런 집이었어”라고 답하는 인상의 만담 같은 문답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계급 세습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다. 앞으로도 서봄이 끊임없이 의문을 표하며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3부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김선영 TV평론가[잉여싸롱] 호구의 사랑? 풍문으로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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