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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를 보고 배울 게 없다면

프랑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말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성공 요인을 영화에 적용하면
등록 2015-03-04 08:22 수정 2020-05-02 19:27

팬픽이 을 뛰어넘었다. (이하 )는 팬픽션 사이트에 쓴 소설이 시작이다. 이 영국 가정주부의 소설은 소설과 드라마 애호가를 위한 온라인포럼에서 탄생한 한 오스트레일리아 출판사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됐다(2010년).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랜덤하우스가 판권을 사들였고 계열사 빈티지가 시리즈 전체를 출판했다(2012년). 한국에서도 2012년 출간됐다(시공사). 미국·독일·프랑스 세계 각국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영화 판권 역시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렸고 2월9일 미국 개봉에서 는 오픈 스코어를 넘었다고 한다. 놀라운 연쇄 성공을 나열하다 잊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소설은 19세 미만 구입 불가요, 영화는 19세 이상 관람가다. 미국에선 R 등급이다.

계약서 조항 훑으며 ‘밀당’ 자연스럽게

“어째서 제게 위험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경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숙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들은 이런 속임수가 나오는 소설을 읽으니까요.”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씨로부터 의 초판을 선물받는다. 선물에는 에 나오는 이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위험하다’는 경고를 ‘19금’으로 읽지만 처녀 아나스타샤는 전혀 모른 채 가슴 두근거리는 한 남자를 만난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경쟁력’을 영화가 구현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호호호비치 제공,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경쟁력’을 영화가 구현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호호호비치 제공,

1부의 책 표지로 내세운 넥타이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졸업반이 되도록 자신을 흥분시키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아나스타샤는 대학에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 있는 부호를 인터뷰하러 간다. 은회색 대리석과 은회색 넥타이, 회색빛 도시 전망 한가운데 그레이씨가 서 있다. 만나는 순간부터 불꽃이 튀는 둘의 결합을 반대하는 요소는 도대체 뭘까. 수많은 이혼 커플의 사유란에 적히는 ‘성격 차이’. 남자는 “사랑은 나누지 않고 섹스만 한다”. 그리고 섹스만을 위한 빨간 방(‘작업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이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섹스 계약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한다.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그에 봉사하며 도미넌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언제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가 계약서의 1항이다.

“나도 쓰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리즈의 신드롬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이 하드코어 로맨스의 흥행을 분석한 책을 펴낸 것이다(, 돌베개 펴냄). 일루즈는 ‘그레이 시리즈’의 성공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먼저 인터넷으로 유포됐다. 팬픽 사이트에서 자신의 사이트로 글을 옮기면서 수많은 수정을 했고, 인터넷의 반응에 작가들이 대응하는 방식대로 좋아하는 것은 추가하고, 비판받는 것은 치밀하게 하며, 독자와 함께 글을 썼다.

성공 요인은 또 있다. 효과가 검증된 연애소설의 전통을 지켰다, 현대인의 애정생활이 품은 수많은 상징을 ‘BDSM’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보여주었다. 성격 혹은 신분 차이를 극복하여 로맨틱한 상황으로 이끄는 것이 로맨스 소설의 기본이다. 이 소설은 섹스만 하는 남자를 ‘사랑’도 하게 이끄는 것이 주제다. 그레이씨는 15명의 여자와 계약관계를 맺었지만 침대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경비행기를 태우거나 팔짱을 끼거나 하는 로맨틱함을 느낀 것은 아나스타샤가 처음이라고 말한다. ‘낭만적 사랑’의 전통이다. 그래도 새로운 점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섹스를 요구하는 관계가 아닌, 거꾸로 섹스로부터 사랑이 우러나오는 관계를 목격한다.” 둘이 만나는 순간이 억지스러워 보이는 데 비해, 둘의 ‘밀당’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데, 이는 계약서의 조항 하나하나를 둘러싼 수긍과 양보에 독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바 일루즈는 그레이 시리즈를 ‘자기계발서’에 비유한다. 루이스 로젠블랫은 독서를 ‘꺼내쓰는 거래’라고 칭했는데 “뭐가 꺼내다 쓸 것을 찾으려는 동기를 가진 행동”이라는 것이다. 책 판매와 함께 두 가지 ‘도구’의 판매량이 증가했다. 킨들(킨들 개발자는 를 판매량의 ‘티핑 포인트’라고 한다)과 섹스 보조도구다. 일루즈는 “성인용품과 그 사용법을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는 대목도 숱하게 나온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로티시즘의 자기계발서”라고 말한다.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는 ‘엄마들을 위한 자기계발서’였던 셈이다.

영화 끝나자 터져나오는 실소

소설의 이 성공 포인트를 영화로 옮겨오면 어떨까. 영화는 ‘여자 감독’에 ‘여자 멘토’를 강조하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여자를 관음적으로 훑는다. 소설에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남자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모습에서 아나스타샤는 아찔함을 맛보는데, 영화에서는 아나스타샤가 ‘그레이’라 적힌 연필을 입술에 갖다대는 모습을 육감적으로 비춰준다. 소설의 1인칭 ‘배움’ 시점은 영화의 3인칭 ‘카메라’ 시점으로 옮겨진 것이다. 유치하지만 직설적으로 처리되는 소설은 적나라한 묘사를 옮기지 못하는 영화의 한계로 인해 보고 배울 것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동영상 강좌의 이점을 추구하는 데 영화는 관심이 없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의 입에서는 실소가 터져나왔다. 소설 강좌는 그렇게 끝나도 배운 게 있었지만, 일껏 멋지게 다른 영화들처럼 만들려고 한 영화에서는 급작스러운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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