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치졸한 욕망, 그 끝에는…

<추적자> <황금의 제국>에 이은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 최종편 <펀치>… 검사복을 입은
조폭이 지배하는 세계,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다 아버지보다 나쁜 사람이 된 아들의 이야기
등록 2015-02-11 06:16 수정 2020-05-02 19:27
법무부 장관 윤지숙(왼쪽 두 번째)과 검찰총장 이태준은 서로 적대하지만 결국 공존하는 관계다. 법무부 장관에서 밀려난 윤지숙은 특별검사로 돌아온다. “이태준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윤지숙의 약속은 지켜질까. SBS 제공

법무부 장관 윤지숙(왼쪽 두 번째)과 검찰총장 이태준은 서로 적대하지만 결국 공존하는 관계다. 법무부 장관에서 밀려난 윤지숙은 특별검사로 돌아온다. “이태준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윤지숙의 약속은 지켜질까. SBS 제공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다 아버지보다 나쁜 사람이 된 아들의 이야기, 박경수 작가의 와 을 20자로 요약하면 그렇다. 그들의 아비도 ‘종’이었다. 태주의 아비도, 정환의 아비도 그랬다. 그들은 착하지만 무능력했고, 나쁘면서 무책임했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결과는 무능력이다. 가난을 부채로 물려받은 아들은 철벽 같은 세상에 부딪혀 착한 캐릭터를 버리고 아비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거기서 박경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21세기 버전 아들의 실패기는 산업화 시대에 탈락한 이들의 자식이 겪는 좌절에서 시작한다.

지랄과 악랄이 법인 세계에서

아들이 들어간 세계는 당연히 천국이 아니다. 정치권을 다룬 , 재벌의 막후극 에 이은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 최종편 는 검찰을 다룬다. 여기는 “지옥에서 만나면 내 얼굴에 침을 뱉어라”고 말하는 인물로 가득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교사 출신의 한 작가는 “다른 사회가 200년에 걸쳐 이룬 개발을 50년의 과속으로 따라잡은 한국 사회가 과연 제정신일 수 있는가”라는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세상, 지옥 같은 현실에서 드라마는 시작한다.

SBS 제공

SBS 제공

그곳은 검사복을 입은 조폭이 지배하는 세계다. 지랄과 악랄이 법인 세계에서 출세를 욕망하는 아들은 권력을 가진 아버지를 만나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권력은 나누기에 충분한 파이가 아니다. 그래서 파이를 훔쳐오고 밥을 나눠주는 아버지는 하늘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니 아들과 아버지 사이를 잇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의 아버지와 아들은 ‘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아들들’이라는 출신성분을 공유한다. 그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게 교육이 계급의 사다리가 되던 시대,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끝자락에 는 걸쳐져 있다. 젊은 검사 박정환(김래원)은 공안검사 출신의 이태준(조재현)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대리 아버지, 이태준의 법은 불법과 편법이다. 이태준을 “정환이가 업어서” 검찰총장 자리에 올린다.

욕망의 극한으로 치닫다가 방파제에서 최후를 맞았던 의 태주와 달리 정환은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욕망의 내일이 아니라 절실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시한부 인생. 뇌종양 판정을 받은 정환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이 없는 자에게 권력은 허망한 것이다. 비로소 정환은 오늘을 살아갈 정신을 차린다. 더구나 혼수상태에 빠진 정환을 태준은 배신한다. 정환은 태준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태준을 향해 돌려준다. 그러나 끝내 이들 사이엔 끊지 못하는 정이 있다. 는 끝없이 ‘누가 식사 메뉴를 고르느냐’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데, 밥상에 마주 앉은 둘이 함께 행복한 장면이 드물다. 오직 정환과 태준의 밥상만 다르다. 둘이 자장면 먹는 장면은 ‘케미’가 넘친다. “후루룩 쩝쩝” 한 젓가락씩 자장면을 넘기면서 주고받는 소리는 심지어 에로틱하다. 서로 적으로 만나는 밥상에도 이런 온기는 남아 있다. 지랄 같은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시작한 걸음이 어느새 지옥문으로 가는 폭주열차가 돼버린 현실을 는 그렇게 연민한다.

“흰 설탕, 검은 설탕”

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넘어서 적대적 공존을 다룬다. 법무부 장관 윤지숙(최명길)은 공안검사 출신 검찰총장 이태준과 맞선다. 그는 “이태준만은 막아야 한다”고 되뇐다. 이태준이 파렴치하고 뻔뻔한 무리를 상징한다면, 윤지숙은 법치에 바탕한 세상을 꿈꾸는 합리적 세력을 대표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여전히 유효한 구도다. 그러나 현실은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최악과 차악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박경수 작가는 계급 문제를 포개서 다른 구도를 만든다. 이태준과 박정환이 “진흙탕을 기어서” 왔다면, 윤지숙은 “꽃가마를 타고 온” 사람이다. 이태준은 경상도 사투리로 “형법책은 저그 아버지가, 민법책은 저그 할아버지가 쓰고… 법으로 열두 폭 병풍을 친 집안”이라고 그녀의 배경을 말한다.

윤지숙은 진영논리를 대표한다. 그의 “이태준만은 막고 싶다”는 말은 점점 욕망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에게는 아들의 병역 비리를 덮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이것을 가리기 위해 그는 정환을 비리 검사로 내몰았다. 그 사건을 통해 정환의 인생은 “다른 차선으로 변경”됐다. 그러나 윤지숙은 “좋은 세상”이라는 변명으로 정당화한다. 이태준은 윤지숙의 틈을 파고들고, 욕망을 자극한다. 그는 어느새 “뭐가 달라질까. 이태준 그 사람 하나 사라진다고”라고 말한다. 이제 차악과 최악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다만 악이 있을 뿐이다. 결국 “서로 칼을 겨눠야 우리가 된다”는 논리로 그들은 적대적 공존관계가 된다. 그의 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검 차장검사는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장관님 대답은 제가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장관님은 이태준 총장 덕분에 존재하는 겁니다.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되셨군요, 장관님.”

여성을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세우고

이쪽이 아니면 저쪽, 여당이 아니면 야당, 두 개의 거대한 편만 보이는 세계는 희생양을 낳는다. 이들을 넘어서는 제3의 꿈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의 희생자는 산업화·민주화 세대의 다음 세대다. 젊은 이들은 이미 구축된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태준을 도왔던 박정환은 물론이고, 윤지숙 장관의 선의를 믿었던 신하경(김아중)도 배신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친구인 이호성(온주완)은 윤지숙의 진의를 의심하게 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는 포로가 인질범의 논리에 빠지는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에 시달린다. 이혼한 부부인 정환과 하경은 윤지숙의 실체를 알아간다. 정환은 이태준과 윤지숙을 몸에 나쁘긴 마찬가지인 “흰 설탕, 검은 설탕”에 비유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공주로 사신 분,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 왕비로 살아가는 건 못 보겠네.” 그러나 는 묻는다. 이들이 과연 구조의 희생자이기만 하냐고, 이들의 선택에 책임은 없느냐고. 진영논리가 주는 편안함에 기대고, 양대 진영이 던지는 떡고물에 연연하는 우리도 공범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렇게 는 정치와 세계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토록 밀착한 작가는 드물다. 〈추적자〉 (위)에서 시작한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은 〈황금의 제국〉(아래)을 거쳐 종착점에 이르렀다. 정치·경제·검찰 권력의 실체를 끝없는 반전을 통해 드러낸 여정이었다. SBS 제공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토록 밀착한 작가는 드물다. 〈추적자〉 (위)에서 시작한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은 〈황금의 제국〉(아래)을 거쳐 종착점에 이르렀다. 정치·경제·검찰 권력의 실체를 끝없는 반전을 통해 드러낸 여정이었다. SBS 제공

신하경마저 흔들린다. “매번 지는데도 법을 지켜야 하나요? 조롱당하면서 신념을 지켜야 하나요?” 이태준을 잡기 위한 수사가 매번 한계에 부딪히자 그마저 원칙을 의심한다. 검찰이 아니라도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 힘이 없다고 조롱당하는 현실은 도처에 있다. 나아가 는 법치가 과연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인지를 의심한다. 법논리는 자주 권력의 변명으로 둔갑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병역 비리 브로커가 탄 비행기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논리로 쓰인다. 검사동일체, 친·인척 배제 원칙도 진실 규명을 막는 걸림돌이 된다. 오히려 사적 복수심이 가장 순수한 동기가 된다. 법을 다루는 검사부터 그렇다. 신하경이 원칙을 지키는 수사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이유도 자신의 아이가 부정입학 당사자로 몰리면서다. “정환씨 다 괜찮은데, 우리 예린이 건드린 사람들 잡자.” 하경이 이태준 세계의 방식으로 이태준을 잡자고 나서는 이유다. 법치를 의심하는 검찰 드라마, 그것이 다. 제목조차 법치보다 ‘펀치’가 정의에 가깝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인물, 제품, 단체는 실제와 전혀 상관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의 자막은 그렇지만,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세진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자살 뉴스를 보면서 쌍용자동차를 생각하게 되고, 실소유주가 누군지를 다투다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오션캐피탈 사건을 보면서 그분의 BBK를 떠올리게 된다. 교수 성추행, 떡값 검사 등 벌어지는 사건마다 깨알 같은 현실이 겹쳐진다. 이런 실물감이 를 드라마로만 보는 것을 방해한다. 자막으로 가려도 의 배짱은 꽤나 두둑하다. 더불어 박경수 작가의 여성 캐릭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은 여성을 재벌의 후계자로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세웠다. 그의 3부작은 권력을 남성만의 전유물로 그리지 않는다. 권력의 세계에 뛰어들어 펀치를 휘두르는 여성들이 있다. 의 신하경은 의 최서윤만큼 드라마의 중심에 서지는 않지만, 의 윤지숙은 의 한정희만큼 중요한 위치에 선다. 젊은 여성뿐 아니라 중년 여성도 권력 드라마의 중심에 세우는 작품은 흔치 않다.

추악한 세계 너머에 가난한 노동이 있다. 에서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이 치졸한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용기를 내는 이들은 서민이다. 살길이 막막한 버스 운전사의 아내는 거짓 증언으로 받은 김밥집을 포기한다. “가게 돌려드리고 지하철 행상에서 시작할게요.” 그가 진실의 편에 서면서 절대악 이태준을 응징할 반전의 기회가 생긴다. “병원에서 나는 피냄새보다 (카센터의) 기름냄새를 맡으면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한 사내의 용기로 윤지숙 아들의 병역 비리를 밝힐 계기가 마련된다. 이들의 용기를 덮는 또 다른 반전이 오지만, 그래도 몸을 쓰면서 사는 이들에게 는 희망을 건다. 비록 그것이 신기루일지라도, 세상이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한 변명은 이제 놓으라

“글자도 모르는 우리 어무이 바느질해갖꼬 내 초등학교 월사금 내고, 또랑에 빠져 죽은 우리 아버지 그 부조금 갖꼬 내 중학교 입학금 냈대이. 우리 형님 대학교 휴학하고 공사판에서 일해가 사법고시 뒷바라지 안 했나. 내 어깨에 우리 어무이 아부지 형님 짐이 있는데 어째 넘어지나.” 이태준이 박정환에게 털어놓은 심정이다. 그의 말을 곰곰이 되씹으면 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들린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라고 미련을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는 잊으라고 한다. “좋은 세상”이라는 명분이든, “애달픈 가족”이라는 개인사든,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한다. 치졸한 욕망의 파국을 보지 않으려면.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