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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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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채우지 않아도 돼

로맨스와 달콤한 감정으로 가득한 마음에 난데없이 생기곤 하는 빈 공간에 대하여
등록 2015-01-28 05:58 수정 2020-05-02 19:27

여자의 마음에는 로맨스로만 채워야 하는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이 존재한다. 사소하게 예를 들자면, 내가 먼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더 사랑해’라는 대답 대신 ‘나도, 근데 지금 바빠요’라는 답장이 온다면, 그때 그 마음에 예의 빈 공간이 훅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빈 공간은 여자에게 알 수 없는 서러움과 근거 없는 외로움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그 순간 그녀들을 완벽하게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여주인공에서, 꽝만 나오는 복권을 쥔 루저의 모습으로 변모시키곤 한다. 이어 그녀들은 ‘이 남자도 아닌 건가?’ 하는 황망함을 느끼거나, ‘이대로 그와 사랑을 계속한다면 나는 평생 이렇게 외롭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격정적이고 극단적인 불안을 맞이한다.

일러스트레이션/ long

일러스트레이션/ long

이 불안한 감정은 곧 그녀들을 오래지 않은 과거 속으로 데려가 추억팔이를 하게 만든다. 그녀들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 싶어서 안달했던 시절에 그가 보낸 지난 메시지들을 들춰보기도 하고,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에 찍힌 도도하고 매력적이기 그지없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보기도 한다. 억울한 마음에 그에게 우다다다 메시지를 보내 따지고 싶지만 그러면, 쿨하지 못한, 조금 질리는 여자가 되니까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와 나 사이에도 그런 날은 오고야 말았다. 내게는 평생 달콤한 꿀인 양 굴던 그가 고작 휴대전화 게임에 몰두하느라, 처음으로 내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왠지 모를 배신감과 분한 마음에 베개를 끌어안고 전화기를 끈 채 씩씩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의 내 경험대로라면 아마 다음은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여자가 되어 베갯잇을 눈물로 적실 차례였다.

그런데 순간 그 모든 게 너무나 피곤해졌다. 퇴근 뒤 평일 밤을 그렇게 소진하기에, 나는 너무나 체력이 달렸다. 그러곤 눈물 흘릴 준비를 거두고 바로 유튜브를 틀어 남자 아이돌 영상 클립들을 보기 시작했다. 아, 너무나 즐거웠다. 그들은 화면 속에서 내게 온전히 집중해줬으며 내가 그에게 듣고 싶었던 달콤한 말들을 노래해줬다. 내 마음속에 그가 만든 구멍은 어느새 차곡차곡 채워져갔다. 놀랍게도 곧 나는 말짱히 회복됐으며,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해 게임을 이겼느냐고 물어봐줄 여유까지 생겼다. 그때 알았다. 유레카! 이래서 남자들이 야동을 보는 거구나! (응? 이건 아닌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느 순간 말문이 트이는 아이들처럼, 연애에도 그런 것이 있나보다. 누군가 말로 가르쳐주지는 않아도 배우고 체득하는 것 말이다. 마음에 빈 공간이 자꾸만 생겨도, 또 그것을 따져 물어도 그 공간은 메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슬퍼하고 힘들어해봐야 내 손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빈틈없이 꽉 들어차 보이기만 했던 처음의 그 마음도 분명히 그립지만, 자꾸만 눈에 뜨이는 마음속 빈 공간까지 인정해줄 만큼 나는 조금 자랐고 조금 약아졌다.

영화 에서 여주인공 마고는 마음속 권태와 빈 공간을 참을 수 없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지만, 그건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 빈 공간에 슬퍼질 때마다 새 남자를 만난다 치면, 세상에 남자 인구만 수천억 명은 더 있어야 할 거다. 우리가 바라는 로맨스와 달콤한 감정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에 생긴 빈 공간을 그대로 두고 또다시 만들어지는 새로운 그림을 지켜보거나, 아니면 내 나름의 다른 색으로 그 빈틈을 채워갈 수밖에. 오늘도 나를 채운 건 8할이 위너와 비스트다. 이 자리를 빌려 어린 오빠들에게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구여친북스 대표 @9lover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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