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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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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를 쌓아라 항공여행 대작전

‘VIP’ 되려고 가장 싼 값에 가장 먼 곳으로 떠나는 항공 덕후의 ‘마일런’… 승무원보다 ‘고된 비행’을 하지만 보너스 항공권 혜택 등 고이율 보장되는 여행 적금 통장 돼
등록 2015-01-24 02:21 수정 2020-05-02 22:17
영화 <러브 인 비즈니스 클래스>의 한 장면.

영화 <러브 인 비즈니스 클래스>의 한 장면.

어떤 사람들은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한 뒤 공항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입국 수속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환승 카운터에서 돌아가는 티켓을 받아들고 타고 온 비행기로 다시 집으로 간다. 수하물도 없이 배낭 하나가 전부다. 시간이 조금 있으면 라운지에서 샤워를 하고 다시 탑승한다. 승무원과 파일럿보다 더욱 ‘고된’ 비행을 하고, 멀리까지 와서 일반적인 의미의 ‘여행’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돌아가는 이 기괴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항공 여행을 하고 있다. 이른바 ‘마일런’(Mileage Run)이라고 한다.

여권에 입국 도장이 찍히지도 않은 채 퀵턴

2013년 2월의 어떤 목요일, 나는 갑자기 주말 동안 마일런을 뛰고 싶어졌다. 출발을 바로 앞둔 시점이라 비행기표 값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미국 일리노이 샴페인에서 멀지 않은, 그리고 미국 공항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당일 왕복으로 유나이티드항공의 272달러짜리 싼 표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이전에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지연 보상으로 받은 항공 바우처를 이용해 거의 무료로 구입해 마일런에 나섰다. 인디애나폴리스~클리블랜드~휴스턴~라스베이거스~휴스턴~인디애나폴리스라는 미국의 중부에서 남부를 거쳐 서부로 갔다가 다시 남부에서 중부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보잉사의 항공기 중 가장 최근에 나온 (초창기 말도 많았던) 보잉787을 좋아해서 어떻게든 이 기종을 운영하는 구간으로 짜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어쨌든 가장 싼값에 가장 많은 마일을 얻는 것이 마일런의 숭고한 철학이므로 목적지가 어디인지 기종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필요도 없었다.

마일런을 하는 이들은 온갖 유혹이 많은 집보다는 인터넷도 전화기도 없는 기내가 훨씬 더 집중하기 좋다고 말한다. 이규호

마일런을 하는 이들은 온갖 유혹이 많은 집보다는 인터넷도 전화기도 없는 기내가 훨씬 더 집중하기 좋다고 말한다. 이규호

우선 휴스턴까지 도착해서는 공항에 있는 자동 체크인 기계인 키오스크로 갔다. 여행 경로(루팅)를 변경할 수 있으면 휴스턴에서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보다 어떻게든 돌아 돌아 가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수회원은 당일 루팅 변경을 무료로 할 수 있다. 휴스턴에서 경로를 변경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다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정을 변경해 미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으로 향했고 뉴욕에서 시카고로, 마침내 인디애나폴리스로 총 7구간의 비행을 했다. 이코노미만 운영하는 단거리 두 구간을 제외하고는 우수회원에게 제공하는 무료 업그레이드 덕분에 비즈니스 클래스로 이동하며 식사도 모두 해결했다. 이 마일런으로 총 1만5천 마일, 최소 270달러, 쓰기에 따라서는 500달러의 가치도 너끈히 할 마일을 얻은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외에도 나는 마일런으로 적지 않은 도시와 나라를 다녔다. 물론 여권에 입국 도장이 찍히지도 않은 채 바로 퀵턴을 한 나라도 있다. 예를 들어 두 번이나 가본 터키이지만, 터키에 대해 갖고 있는 경험이라고는 공항에서 파는 유독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이 굉장히 맛있었다는 것과 터키항공 라운지가 매우 좋았다는 기억밖에 없다.

몇 달 전부터 싱가포르에 거주하면서 가끔 이렇게 ‘마일런’ 삼아 미국에서 1만6천km 정도 떨어진 이곳까지 온 ‘덕후들’을 만나기도 한다. 새벽 2시에 도착해서 3시간30분 뒤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하루 잠깐 시내 관광을 하고 돌아가는 이도 있다. 마일런의 경우 보통 하루 이상 머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데, 그것은 체류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차 적응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가장 싸고 멀리 가되 절대로 현지의 시차에 적응하지 않고 자기가 살던 시차로 여행을 마치는 것이 체력을 그나마 아낄 수 있는 방법이다.

“아일랜드 호핑하실 거예요?”

한번은 (일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홍콩을 거쳐 시카고로 들어가기 위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다. 내 앞자리에 서 있는 낯선 중년의 남자에게서 ‘항공 덕후’의 향기가 물씬 났다. 대충 복장과 들고 있는 소지품을 보면 감지되는 덕후의 아우라는 이 바닥 생활을 하면서 진화된 식스센스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카운터는 열지 않았고 서로를 인지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싱가포르 출신으로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그는 싱가포르에 계신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매달 샌디에이고와 싱가포르를 오간다고 했다. 가능한 한 ‘마일런’으로 짜고 싶어서 매번 다르게 루트를 짜는데, 이번에 돌아갈 때는 싱가포르~홍콩~나리타~괌~호놀룰루~샌프란시스코~샌디에이고로 짰다고 했다. 그 순간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그에게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주둔지를 돌던 항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괌에서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7시간30분이면 갈 거리를 그 사이 마셜제도의 마주로를 비롯해 미크로네시아의 트루크제도에 이르기까지 총 5개의 섬을 깡충깡충 들러 14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는 구간으로 항공 덕후들에게는 꼭 해봐야 하는 버킷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아일랜드 호핑이다. 그는 이번에는 안타깝게 시간이 안 맞아 못하지만 조만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일런의 경험과 선호하는 기종과 자리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새벽을 보냈다. 홍콩에 도착해 환승 대기를 위해 라운지로 들어가던 중, 라운지 직원이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빨리 전화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전화를 한 그는 얼굴이 굳었다. 우리가 홍콩으로 향하는 하늘에 있는 사이 그의 아버지께서 하늘로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급히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편도 비행편을 마일리지로 구입해서 발권을 했다. 그에게 위로와 작별의 포옹을 하는데 그가 “그래도 마일런 덕분에 항로를 싱가포르~도쿄로 잡지 않고 홍콩으로 쪼개서 잡는 바람에 빨리 소식을 알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했고, 나는 “그만큼 빨리 돌아갈 수도 있고요”라고 말했다.

이규호씨가 마일런을 하며 지났던 캐나다 토론토 공항. 이규호

이규호씨가 마일런을 하며 지났던 캐나다 토론토 공항. 이규호

어느 날 한 친구는 왜 이렇게 피곤한 미친 짓을 하느냐고 물었다. 주말 동안 과제로 주어진 책을 읽어가야 하는데, 온갖 유혹이 많은 집보다는 인터넷도 전화기도 없는 기내가 훨씬 더 집중하기 좋으며 게다가 기내에서 굶지 말라고 밥까지 챙겨주니 주말 동안 삼시 세끼 뭐 해먹을까 고민하지 않고 참 좋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마일런은 얼핏 돈 많고 시간 많은 한량의 사치스런 취미생활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비행기는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일런의 이면을 보면 특정한 ‘덕후의 경제학’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일리지 제도의 틈새가 있다.

우수회원 혜택의 꿀맛을 본 사람들

일차적으로 항공사들의 우수회원 프로그램에 있다. 마일런이 가장 흥한 미국의 경우 항공사들은 매년 자격요건(대략 탑승 2만5천, 5만, 7만5천, 10만 마일)을 채운 각 등급의 우수회원에게 상응하는 혜택을 준다. 수하물 무료, 상위 클래스로의 무료 업그레이드, 좋은 좌석 우선권, 탑승 마일리지 2배 적립, 그리고 엄청나게 비싼 각종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혜택이 있다. 이 때문에 우수회원 혜택의 꿀맛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회원 등급을 유지하거나 올리려고 하며, 자격요건이 다소 모자란 경우에는 마일런을 강행하게 된다.

우수회원에게 주는 혜택도 혜택이지만 마일런은 일종의 고이율이 보장되는 여행 적금 통장이기도 하다. 대개 마일리지 적립은 항공권 금액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반면 보너스 항공권은 지역을 기준으로 하고 제휴 항공사를 섞을 수도 있으니 가장 적은 금액으로 마일을 적립해 평소 가고 싶었으나 티켓값이 엄청 비싸 돈 주고 가기에는 힘든 여행지를 갈 수 있게끔 해준다. 나 같은 경우에도 마일런으로 착실히 모은 마일리지로 미국의 방학 때는 1800달러를 상회하는 한국행 왕복 항공권을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들여 모은 마일로 해결하곤 했다. 아울러 돈 주고 사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값비싼 비즈니스나 퍼스트로 적은 돈을 들여 호화로운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도 있다. 마일리지는 사용하기에 따라 1마일에 10원의 가치로 쓸 수도 있고 100원의 가치로도 쓸 수 있는 여러 제도적 특징과 틈새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잘 기획한다면 이보다 나은 이율을 보장하는 여행 적금이 따로 없다.

물론 ‘덕질’의 이유도 있다. 항공 덕후라면 한 번쯤 꼭 해봐야 한다는 호사스러움을 누리고 싶어서 하기도 한다. 루프트한자 일등석을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퍼스트 전용 터미널에서 주는 각종 독일 맥주를 마시며, 탑승을 위해 이동할 때는 터미널에서 항공기 게이트까지 직접 전용 운전기사가 포르셰나 벤츠로 데려다주는 호사스러움 말이다. 루프트한자와 전일본공수 그리고 타이항공 등이 퍼스트 클래스의 장거리 노선에만 제공한다는 리모아에서 나온 기내용 편의용품 가방을 모으기 위해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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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런을 즐기는 한 항공 덕후는 결혼할 때 이상한 고백을 해야 했다. 자기는 종종 주말에 사라질 수도 있는데, 마일런을 하러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아내는 처음에 이해할 수도 없었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지만 가족여행 때 돈 주고 사는 항공권보다 적은 돈을 들여 비즈니스 클래스로 여행을 하고는 누구보다도 더욱더 적극적인 마일런의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과연 어떤 게임이 다시 벌어지려나

얼마 전 한국 항공권 시장에는 미국의 몇몇 도시로 왕복하는 아메리칸항공의 티켓이 총 30만원이 채 되지 않는 값으로 풀렸다. 담당자의 요금 입력 실수였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근에는 유나이티드항공이 인천에서 미국의 주요 도시를 왕복 430달러에 풀면서 한국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사람들도 마일런을 위해 엄청나게 구입해 금방 동이 나버렸다. 물론 이 중엔 값싼 항공권이 나오자 그곳으로 여행 결정을 한 사람도 많긴 하다.

하지만 이런 마일런의 아름다운 세계는 조만간 추억의 저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항공사들은 이렇게 돈이 되기보다는 싼값에 마일리지를 모아서 비싸게 쓰고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우수회원 혜택을 누리며 항공사의 등골을 빼먹었던 마일러너들에게 칼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델타는 탑승 항공 거리가 아닌 티켓값에 기준해 마일리지와 우수회원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아울러 유나이티드도 올 3월부터 델타와 같은 방식을 따른다고 결정했다. 그 외의 항공사들도 점차 이런 추세로 가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쏟아진다. 이 소식에 마일러너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올 2월을 시한부로 그 이전에 마일런을 뛰러 다니느라 폭발할 지경이다. 항공사와 여행자의 노련한 두뇌게임의 하나였던 마일런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데, 과연 어떤 게임이 다시 벌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규호 미국 일리노이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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