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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여고 탐정단>에 필요한 탐정 멘토는?

등록 2015-01-17 06:42 수정 2020-05-02 19:27

독설 카리스마, 셜록이 필요해

JTBC 제공

JTBC 제공

한 무리의 괴짜 소녀들이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달려온다. 연극부 창고를 빌려쓰고 있는 자칭 탐정단. 그들이 붙잡으려는 상대는 ‘무는 남자’라는 변태 범죄자, 일단 곳곳에 꽂아둔 별난 캐릭터들과 10대 취향의 장난스러운 연출로 시선을 붙잡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미스터리 특유의 끈끈한 궁금증이 안 생긴다. 누군가 이들을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한 것 같다.

고등학교가 무대이니 소년 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을 파견하겠다는 주장도 있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여자고등학교라는 금남의 지역에 이들을 침투시키기란 쉽지 않다. 아니 더 큰 문제가 있다. 저 소년들만 등장하면 줄줄이 기어나오던 시체들을 떠올려보라. 추리 장르의 꽃은 살인사건이라지만, 엉뚱하지만 착한 소녀들의 세계를 피범벅이 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래, 주인공 채율의 말에 귀기울여보자. “이 학교, 담임, 애들, 그리고 아까 그… (무는 남자까지) 전부 벌칙 같다. 엄마랑 세상이 짜고 나한테 준 벌칙.” 그래, 이 벌칙을 교정할 사람이 필요하다. 강력한 충격을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의 선택은 영국인 셜록을 원어민 교사로 파견하는 거다. 바라는 것은 그의 놀라운 추리력이 아니다. 남 신경 안 쓰는 독설로 채율 어머니와 교장선생님을 잘근잘근 저며주고, 갑갑한 학교를 확 뒤집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흐릿한 탐정단 캐릭터들에게 카리스마의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는 지금 이도 저도 아니다. 혼자 해도 될 대사를 네 명이 번갈아 내뱉는 것도 지루하고, 코앞에 향을 내밀며 “네 영혼을 들이마셔”라는 식의 오컬트도 맥이 빠진다. 셜록처럼 사건을 휘어잡을 강렬함이 필요하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최상의 롤모델

은 10대 소녀 공동체라는 정체성만으로도 환영할 만하다. 추리와 수사물에서 여성, 특히 어린 소녀는 희생자인 경우가 흔했다. 여성 탐정이나 수사관이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사례도 적었다. 이 와중에 소녀들이 지적 능력은 물론 공감 능력이라는 여성 특유의 강점을 무기로 공동 수사에 나서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전복적 쾌감을 준다.

이런 면에서 멘토 겸 선배로 추천하고 싶은 이들은 여성추리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영국 드라마 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 해독을 담당한 ‘블레츨리 파크’ 소속의 여성암호해독자집단이다. 가상의 모임이지만, 당시 블레츨리 파크에서 활약한 이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종전 뒤 평범한 여성의 삶으로 돌아갔던 ‘블레츨리 서클’은 런던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다시 뭉친다.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무명의 존재로 살아가던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의 제한된 사회적 조건을 환기하고, 연쇄살인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것은 그 그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첫 사건이 소녀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 속칭 ‘바바리맨’의 변주인 ‘무는 남자’ 찾기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블레츨리 서클’이 함께 뭉쳤을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차별적 현실과 맞서야 하는 여성 연대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깊은 유대감을 통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선암여고 탐정단’에 이보다 좋은 롤모델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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