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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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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협업, 실험의 변주곡

현대미술가와 큐레이터의 상호 완전 합의·타협에서

벗어난 비평적 창작으로 새로운 출구 찾아가
등록 2014-06-21 03:56 수정 2020-05-02 19:27

한국 디자인계에 소규모 스튜디오 시대가 개막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돼간다(대략 2004∼2005년부터). 제 작업의 특성을 이해해주는 클라이언트를 가려 만나며 지속 가능한 형태의 창작을 영위한다는 것이, 소규모 스튜디오 운영의 핵심.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클라이언트는 자신을 협업자로 간주하는 이들, 즉 일부의 현대미술가와 큐레이터다.

사회 습속에 순응하는 형태로 저항하기

신동혁 디자이너는 구글번역기를 이용한 번역 오류를 통해 ‘오작동 라이브러리’(2014)에 참여했다(왼쪽). 김영나 디자이너는 연필·노트·컵의 상품을 재구성해 그래픽적 시각성을 구현한 선물 상자 ‘더 쇼-룸’(2014)을 만들었다.

신동혁 디자이너는 구글번역기를 이용한 번역 오류를 통해 ‘오작동 라이브러리’(2014)에 참여했다(왼쪽). 김영나 디자이너는 연필·노트·컵의 상품을 재구성해 그래픽적 시각성을 구현한 선물 상자 ‘더 쇼-룸’(2014)을 만들었다.

예컨대, 지난 6월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30∼40대 청년작가 기획전 ‘오작동 라이브러리’(8월3일까지)에서 도록과 홍보물 디자인을 맡은 그래픽디자이너 신동혁은, 초청 작가는 아니지만 사실상 작가로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전시의 기본 취지는 “대안적 지식생산자로서 현 사회를 바라보는 비평적인 시선을 제공하거나 나름의 규칙과 기준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 가공, 재맥락화하는 과정을 통해 언뜻 이상해 보이는 정보들을 생산”하는 작가들을 한데 모아 그 방법론을 살펴본다는 것. 큐레이터의 기획에 부응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전시 홍보 텍스트를 여러 나라 말로 번역하고, 그것을 이용해 전시 배너 등 홍보물을 디자인했다. 정보적 오작동을 기계적으로 활용한 디자이너의 변주는, 그 자체로 전시의 일부가 되는 협업이었던 셈.

큐레이터의 기획에 부응하는 그래픽디자인으로 전시를 포괄하는 동시에 그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디자이너들이 즐기는 작업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런 전략의 바탕엔, 디자이너가 일련의 작업 진행 과정에 비평적으로 간섭하고 개입한다는 아이디어가 깔려 있다. 통상적 디자인 업무가,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소비자/사용자(관객)의 수용 사이에서 효율적 소통을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디자이너에게 요구한다는 점을 역이용하는 것, 즉 디자이너를 활용하는 사회의 습속에 순응하는 형태로 저항하려는 것이다.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범을 제시한 슬기와 민의 경우, 2010년 경기도미술관의 의뢰로 기획전 ‘유원지에서 생긴 일’의 디자인을 맡았을 때, 역시 요상한 전시 홍보 배너 ‘제목 없는 인사’를 구현한 바 있다. 유원지나 놀이공원에서 그 영역이 ‘어서 오십시오’와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관습화한 인사말 표지판으로 명시화된다는 점에 착안한 슬기와 민은, 여러 언어- 인근 안산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뜻에서- 로 번역한 두 인사말을 겹쳐놓음으로써 전시 영역의 관습적 인지에 덫을 놓고자 했다. 고로, 어서 오라는 것인지, 어서 가라는 것인지 그 뜻이 모호한 이 메시지들은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한국 사회의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하는 풍경이 됐다.

그래픽디자인 동네 넘어 3D 분야로

협업의 달인쯤 되는 슬기와 민은, 기획전 ‘오작동 라이브러리’에도 간접 참여했다. 초청 작가인 Sasa[44]의 협업자로 신작의 디자인을 맡았던 것. 오타쿠적 정보 강박을 지닌 미술가 Sasa[44]는 2007년부터 제 일상적 활동의 정보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그것을 모아 해마다 연감을 발표하고 있다(출판사는 슬기와 민이 운영하는 유령 출판사인 ‘스펙터프레스’).

자료집 형태로 발간된 은 이렇게 시작한다. “2006년 한 해 동안 SASA[44]는 설렁탕을 52그릇, 자장면을 84그릇 먹었고, 교통카드를 235회 사용했고, 서울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220편 보았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258권 구입했고, 휴대전화로 1063건의 전화를 걸었고, 각종 공공기관에서 총 196명이 먼저 용무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볼일을 보았고, 출퇴근 기록기로 1083건의 작업실 출입 기록을 얻어냈다.”

정보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작가는, 늘 슬기와 민에게 의뢰해 출간 형식을 요리조리 변주하고 있다. 농담 삼아 “예산 특정적 작업”이라고 불리는 이 장기 협업은, 확보된 예산에 최적화한 양식으로 출판된다. 이번 전시에서 첫선을 보인 는 포스터 형식으로 총 3500부(특별판 500부 포함)가 제작돼, 갤러리 공간에서 관객에게 무료 배포되고 있다.

창조적 협업은 비교적 보수적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시도할 정도로 시대의 대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아트숍 콜라보레이션’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들에게 아트숍 울(UUL)의 윈도 설치 작업을 의뢰하고 있다. 지난 3월 개막한 다섯 번째 프로젝트(6월30일까지)는 그래픽디자이너 김영나와의 협업. 디자이너는 아트숍에서 볼 수 있는 연필·노트·컵의 상품을 재구성해 그래픽적 시각성을 구현하는 공간과 그 재료들로 구성된 검정색 선물 상자를 제작했다. 제목은 ‘더 쇼-룸’(The Show-Room).

관절처럼 꺾이는 경첩 구조의 공통 언어

미술관 쪽이 제공한 설명문에 따르면, 이는 “사용서가 없는 상품이자, 사용서가 필요한 작품이며, 전시장 없는 전시 공간이자 동시에 이 사물을 소유하는 사람들만이 열어볼 수 있는 제한된 구역”이 된다는 것. 그런데 상자를 구매한 사람은 누구나 작업을 설치-연출할 수 있게 되므로, 이는 이를테면 DIY 현대미술/디자인 상품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 협업은 그래픽디자인 동네에서 더 활발하지만, 3D 작업을 하는 이들도 종종 협업에 나서곤 한다. 대표적인 작가/디자이너가 잭슨홍. 그는 2010년 무용가·배우 정금형과 협업해 페스티벌 봄에서 란 무대 작업을 선뵌 바 있다.

협업의 첫 단계에서 디자이너는, 진공청소기 따위의 사물과 제 몸을 마주 놓은 채, 애욕(愛慾)의 몸짓을 하나하나 연구·개발해온 정금형의 작업 세계와 제 작업 세계를 포개 공통된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다. 사물의 편에서 비평적 디자인을 시도하며 디자인 방법론의 다양한 층위를 실험해온 자신과 정금형의 공통 언어는, 관절처럼 꺾이는 경첩 구조였다. 열쇠 개념이 도출되자, 잭슨홍은 ‘정금형의 움직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인간과 사물의 난교가 이뤄지는 공장’이란 개념을 도출했고, 각종 생산 도구들을 서둘러 제작했다. 그다음은 정금형의 차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잭슨홍이 제시한 사물들을 재해석해 하나하나 캐릭터를 도출하고, 그들과의 2인무를 통해 사랑의 서사시를 귀결지었다.

상호 완전 합의·타협에 의한 통상적 협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실험들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위상을 변주하고 그 업무를 재정의·재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평적 협업이 중요한 이유는, 전통적인 디자이너의 비즈니스 활동 영역이 이미 포화 상태를 지난 지 오래이기 때문.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디자이너들의 비정상적 협업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시도될 전망이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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