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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

‘오디오환자’들의 오디오‘무도’

빈티지 오디오 카페 ‘빈티지마을’이 주최한 ‘파워앰프 배틀’ 참관기… 자작 오디오 ‘궁극의 소리’에 ‘황금귀’ 고수들도 헷갈려

제978호
등록 : 2013-09-11 15:16 수정 : 2013-09-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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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오후 2시 무렵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엘피(LP)바 ‘피터폴앤메리’는 중년의 아저씨들로 가득 찼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도사풍 아저씨를 비롯해 60여 명의 참석자 중 여성은 1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 30대의 얼굴도 보였지만 대부분 40~50대였고 60대 이상 초로의 신사도 눈에 많이 띄었다. 경남 거제·마산, 강원도 춘천 등 지방에서 아침 일찍 상경한 이도 있었고, 일부는 일요 근무를 작파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가족과의 시간을 반납하고 3만원짜리 입장료까지 기꺼이 지불한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묘한 흥분이 교차했다. 무엇이 아저씨들을 들뜨게 만들었을까? 다름 아닌 빈티지 오디오 배틀이다. 참가자의 면면은 의사·기자·무직 등 직업과 처지는 각양각색이었지만 ‘오디오 환자’라는 지적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 오타쿠 아저씨들이다.

미국 웨스턴일렉트릭과 독일 클랑필름

이날 참석자들은 회원만 1천 명 가까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빈티지 오디오 카페 ‘빈티지마을’ 회원. 이 카페에서 주최한 ‘파워앰프 배틀’의 구경꾼이자 판정관으로 참가했다.

빈티지 오디오의 양대 산맥인 미국 웨스턴일렉트릭(WE)의 275 출력관, 독일 텔레푼켄의 RE604 출력관을 기본관으로 해서 파워앰프를 만든 뒤 공통의 스피커와 프리앰프, 콤팩트디스크플레이어(CDP)에서 나오는 소리를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승부를 가리는 배틀. 판정 결과 이긴 쪽이 상대의 진공관을 전리품으로 챙기는 ‘잔혹한’ 배틀 방식이 게임 참가자들의 흥미를 배가시켰다.

세상에 오디오 마니아가 적지 않지만 이들은 40~80년 전에 생산된 고물 오디오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오타쿠 중의 오타쿠다. 실제 이날 참석자들은 대개 오디오 이력 수십 년이 된 오디오파일들이다. 1930~60년대에 나온 빈티지 진공관, 트랜스, 각종 스피커 유닛을 이용해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를 자작하는 오타쿠 아저씨들도 상당하다. 빈티지 오디오의 명기 중 하나인 알텍 A5의 소리를 추구하는 조규태씨는 “중학교 때부터 납땜·인두질했으니까 오디오를 만진 지 50년이 됐다”고 말했다.


독일 텔레푼켄 RE604 출력관을 이용해 만든 RE604 앰프(왼쪽). 9월1일 앰프 배틀에서 웨스턴일렉트릭 275 앰프에 1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미국의 대표적 빈티지 오디오사 웨스턴일렉트릭의 275 출력관을 이용해 만든 WE275 앰프(오른쪽). 정광일 제공
이날 앰프 배틀은 두 중년 오타쿠의 치기 어린 말다툼에서 비롯됐다. 빈티지마을 운영자이자 자작 빈티지 앰프 애호가인 엄민형(54)씨가 서울 압구정동의 피터폴앤메리에서 미국 빈티지 오디오를 대표하는 웨스턴일렉트릭 한국 최고수로 일컬어지는 이대익씨와 술자리를 하다, 생산국별 진공관 선호도로 인해 대립적 주장을 펼친 끝에 그럼 자웅을 겨뤄보자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엄씨는 다음날 빈티지마을 카페에 “WE교에 있어서 ‘추기경’급의 위상이신 이대익님께서 유럽관에 대해 약간 낮게 평가하시고 유럽관 애호가인 제가 발끈해서 생긴 일”이라며 앰프 배틀 사실을 공지했다.

시작은 사소했으나 그 과정은 만만찮았다. 엄씨는 결전의 날을 9일 앞둔 8월23일 유럽파 앰프 전문가들과 함께 막바지 앰프 제작에 몰두하다 화공약품을 떨어뜨려 배와 다리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긴급 후송되는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다. 엄씨의 사고 소식은 카페를 통해 긴급 공지되면서 그렇잖아도 유럽파와 웨스턴파로 나뉘어 펼쳐지던 응원전을 더욱 가열시켰다. 사실 빈티지 오디오는 1920~30년대부터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과 독일의 클랑필름이 양 대륙 간의 치열한 기술개발 경쟁을 벌인 분야다. 주로 극장용 오디오로 개발된 이들 장비를 생산한 양 진영이 이미 1930~40년대에 오디오의 모든 것을 이뤘다고 빈티지 마니아들은 믿고 있다.

“시장에 팔면 3천만원 이상 될 것”

빈티지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서로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분야다. 나도 독일 쪽 빈티지 오디오(스피커 텔레푼켄 O85a, 파워앰프 V69a, 프리 WV-2, 턴테이블 emt 930st)를 보유한 도이치 사운드 추구파여서 내심 RE604 앰프의 승리를 기대하고 심사에 임했다. 심사는 재즈·가요 5곡, 클래식 5곡 등 10곡을 RE604와 275 앰프로 교대로 들려주고 어느 쪽이 좋은 소리를 내는지를 참가자들이 기입해 많은 표를 얻는 쪽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고백건대 두 앰프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낼까 말까 망설이다 B 앰프가 A 앰프보다 6 대 4로 앞선 채점표를 제출했다. 결과는 무승부 8표, RE604 앰프 18표, 275 앰프 19표로 275 앰프의 1표 차 승리로 나타났다(RE604 승리로 표기한 채점표 하나가 제출되지 않은 채 발견돼 공식적으론 2표 차).

아이러니한 것은 배틀 앰프를 정확하게 구분한 참가자가 소수에 그쳤다는 점이다. 두 앰프에 사용된 관의 특성을 잘 아는 ‘황금귀’를 가졌다는 오디오 고수들마저 상당수 두 앰프의 정체를 헷갈렸던 것이다.

특히 두 앰프를 맞히지 못한 채점표가 80%에 달했다고 엄민형씨는 설명했다. 나도 B를 RE604 앰프로 착각했다. 심지어 RE604 회로 설계자마저 두 앰프를 착각했다고 한다. RE604와 275 진공관은 본래 소리의 성향과 음색의 차이가 비교적 명확해서 빈티지 오디오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구분하기 어렵지 않은데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은 물론 설계자와 제작자들마저 오답을 써낸 것은 무슨 조화인가? 엄씨의 해명은 이렇다. “우선 먼저 제작된 275 앰프의 소리를 들었던 사람 여러 명이 ‘주로 하이엔드적인 음이고 광대역에 섬세하고 투명한 쪽이며 도이치 음색에 가깝다’는 글을 올리면서 275 앰프의 음에 선입견으로 작용했고, 반면 RE604는 제작 초기에 음이 미국관 소리처럼 두껍고 풍윤하고 약간 강렬한 소리가 난 것이 미리 들은 사람들에 의해 소문 나면서 모두에게 반대 성향의 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다 배틀 막바지에 양 진영이 서로의 앰프를 듣고 비교하며 서로의 장점을 더 좋게 느끼면서 서로의 음색에 가깝게 튜닝해나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순간에 완벽하게 반대 음색으로 서로 크로스 체인지 됐다는 게 엄씨의 설명이다.

양쪽의 치열한 신경전은 선곡 과정에서도 작용했다. “막판에 새로 선곡하면서 상대방 앰프에서 안 좋게 들릴 만한 녹음부실의 곡이 침투하는 어지러운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웃음)” 실제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에선 275 앰프의 소리가 일부 찌그러지게 들리기도 했다.

처음엔 술자리의 치기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획자와 지원팀들은 물론 양 진영에 대한 지지자들의 집단 자존심 대결 양상이 되면서 열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2개월 동안 양쪽의 열정적인 작업의 결과로 해상도 높고 풍성한 음색의 명품 앰프를 만들어낸 데 대해 참석자들은 갈채를 보냈다. 이번 배틀의 승자인 275 앰프 제작자는 평가가 끝난 뒤 ‘얼마쯤 할까요?’라는 질문에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들었어요?’ 하는 질문과 마찬가지”라고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비교 청취 장소를 제공한 피터폴앤메리의 주인 한계남씨는 “시장에 판매하면 3천만원 이상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부상 무릎쓰고 오직 최상의 소리 집착

앰프 비청회에 이어 열린 한지 스피커 시청 행사도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닥나무 한지로 콘을 만든 8인치 풀레인지와 스프루스 자작통의 울림은 이날 비청 행사에 동원된 4천만원짜리 독일 보자티브에 못지않고 일각에서는 그보다 낫다는 평가도 나왔다. 내가 듣기에도 해상력이 뛰어나고 풍윤한 소리를 내는 한지 스피커의 가능성이 놀라웠다. 한지 스피커 제작자인 김준·안승택씨 등과 협력하고 있는 엄민형씨는 “동호인들의 협동조합 형태로 한지 스피커를 생산해 수출할 계획”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9월1일 서울 강남구 압구 정동 LP바 ‘피터폴앤메리’ 에서 열린 자작 앰프 배틀 참가자들이 진지한 표정으 로 ‘블라인드 테스트’에 임 하고 있다.
행사 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서로의 오디오를 소개하며 ‘궁극의 소리’ 추구라는 공통의 이상에 대해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이 피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선 몇 가지 한계와 과제도 제기됐다. 우선 이번 배틀의 모니터 스피커로 사용된 8인치 풀레인지 스피커가 기본적으로 근거리 청취의 가정용이어서 60명의 인원이 꽉 찬 40여 평의 행사장 공간을 고루 울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 나도 앞에서 들을 때는 소리의 차이가 어느 정도 확연했으나 뒤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앰프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애먹었다.

1세대 오디오 고수로 평가받는 박일남(62)씨는 “청취 장소 앞과 뒤의 소리 차이가 너무 컸다”고 말했다. 또 하나 엄씨도 자인했듯 이날 배틀에 사용된 곡들 또한 앰프의 특성과 성향을 충분히 드러내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오디오라는 게 소스의 음악성을 최대한 구현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면, 이번 배틀은 소스의 한계로 그 의미가 반감된 측면도 있다. 특히 빈티지 오디오가 LP 같은 아날로그의 소리를 재현하는 데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CD를 소스로 이용한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수백W에 이르는 고출력 트랜지스터(TR) 앰프를 값싸게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각각 1W, 1.5W의 소출력 구식 앰프로 스피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양 진영 앰프 기획·설계자(배성호·장대근씨)들의 놀라운 내공에는 참가자 대부분 이견이 없었다. 특히 화상을 입고도 오직 최상의 소리에 집착한 엄씨의 부상 투혼은 오디오파일들을 왜 미친 사람(마니아)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실례였다.

이번 배틀을 기획한 엄민형씨와 이대익씨는 배틀 다음날 또 다른 진검승부를 선언했다. 패배의 결과 자신의 자작 앰프에 사용된 개당 시가 100만원에 가까운 RE604 1조(2개)를 바친 엄씨는 복수전을 요구했고, 승자인 이씨가 흔쾌히 동의했다. 이번에는 양 대륙의 더 귀한 고급관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각각 웨스턴일렉트릭과 지멘스의 대표관으로 관 하나 가격이 각각 500만원을 훌쩍 넘는 300A와 ED관으로 앰프를 새로 자작해 올해 내에 복수전을 열기로 합의했다. 엄씨는 유러피언 오디오 성원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2차전 승리로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번에는 웨스턴일렉트릭의 명기인 15A+597A와 같은 대형 혼스피커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큰 공간에서도 소출력 앰프의 성능을 충실히 발휘하는 것을 구상 중이다.

아저씨들의 오디오질은 어디까지

어쩌면 청취자의 개인적 취향이 가장 많이 반영되는 취미생활인 오디오 분야에서 이미 최상급으로 검증된 진공관을 가지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 이번 배틀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열린 첫 행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자도 승자도 즐겁게 어울려 축제로 행사를 마무리짓는 것을 보면, 승부의 결과보다 그들에겐 과정의 즐거움이 더 커 보인다.

자신의 손끝으로 과거 최고의 소리를 오늘날에 재현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만드는 짜릿한 묘미를 빼놓을 수 없다는 오타쿠 아저씨들의 무도는 계속된다.

가정의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 가장 어려운 취미생활이라는 아저씨들의 오디오질은 어디까지 허용될까? 9월1일 앰프 배틀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아내가 물었다. “왜 나는 안 데리고 갔어?” 나는 일순 당황하다 “여자는 아무도 없었어”라고 얼버무렸다.

김도형 <한겨레> 경제국제 에디터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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