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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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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특별한 날, 한 편의 ‘시’가 된, 도시‘락’

화려한 식탁이 한 그릇으로 압축된 도시락… 피크닉마다 새로 만드는 도시락, 아침마다 받아먹는 다이어트 도시락, 팬들이 스타에게 바치는 조공 도시락
등록 2013-06-02 05:24 수정 2020-05-02 19:27

흔한 김밥 도시락은 재미가 없다. 달걀말이 반찬도 진 부하다. 급식 세대 이전에 학창시절을 보낸 도시락 세대 를 중심으로 도시락 트렌드가 다시 쓰이고 있다. 대형 서 점에는 세상의 반찬 가짓수만큼이나 많은 도시락 책들 이 진열돼 있다. 요리책 코너에 따로 마련된 도시락 섹션 에는 상황·메뉴별로 도시락 책이 빽빽하다. 30대 초·중 반 직장인이 주요 소비층인 배송 도시락 시장은 거의 포 화 상태다. 아이돌의 ‘이모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나 배우를 위해 특별한 도시락을 주문하는 데 서슴없이 지갑을 연다. 이른바 ‘조공 도시락’ 혹은 ‘서포트 도시락’ 은 이제 연인에게,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도 배달된다. 도시락 쌀 일이 많아지는 5월이면 도시락 세대 엄마들은 도시락 예쁘게 싸는 정보를 온라인상에서 공유하기도 한다. 화려한 밥상이 흔한 시절, 우리는 왜 한 끼 식사를 압축한 한 그릇 도시락에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여 기저기서 자신만의 도시락을 싸는 이들의 수다를 들어 봤다.

영진닷컴 제공

영진닷컴 제공

엄마의 뒷모습이자 학창시절

최근 종영한 드라마 (KBS)에서 도시락은 ‘엄마’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계약직 사원 정주리(정유 미)가 기획한 ‘엄마한테 잘하자 도시락’은 홀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을 안쓰러워하는 엄마가 부산에서 직접 도시락을 싸온 데서 비롯한 아이디어다. 직장인 윤 선혜( 저자)씨에게도 도시락 은 “매일 새벽 도시락을 싸주시던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 리게 하는 도구다.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며 직장 생활 을 하는 윤씨는 회사 구내식당이 생기기 전까지 직접 도 시락을 싸서 출근했다. 매주 목요일은 도시락을 싸기 위 해 장을 보는 날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도시락에 자주 넣 어주셨던 오징어채볶음, 달걀양파부침을 종종 따라 만 들어보기도 했지만 손맛을 따라잡긴 어려웠다. 대신 호 두멸치볶음 등은 자신의 ‘시그니처 메뉴’가 되었다. 회사 근처 식당에 가면 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가 꾸준히 도시락을 쌌던 이유는 “학창시절을 도시락과 함 께해 그 추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란다. “교실에서 의자를 돌려 앉아 도시락을 펼쳐 먹던 기억, 소풍날 서로의 김밥을 비교하며 나눠 먹던 기억” 같은 것이 몸속 어딘가 에 새겨져 그 비슷한 풍경을 만날 때면 도시락 뚜껑을 열 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직장인 김지혜(30· 저자)씨 는 소풍 마니아다. 날씨가 따뜻해진 요즘은 매 주말 강과 산, 가까운 공원을 찾아 돗자리를 편다. 김씨는 틈만 나 면 머릿속으로 도시락을 여러 차례 쌌다 풀었다 한다. 다 가오는 주말에는 한강 잠원지구에서 자전거를 탈 예정 인데, 고추냉이 양념을 한 매콤한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새우살을 이용해서 초밥을 만들고 아스파라거스를 곁들 이기로 했다. 2년여 전 빈손으로 교외에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사먹은 도시락이 김씨에게 도시락의 추억을 불러 왔다. “별것 없는 저렴한 도시락이었는데 아주 맛있었어 요. 그때부터 어디 나설 때면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죠. 계절·장소별로 어울리는 도시락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 이 재미있어요.” 김씨가 두세 가지 메뉴의 도시락을 준비 하는 데 드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공과 시간이 소모되는 데도 매번 도시락을 준비하는 이유는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 음식을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란 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자극적인 음식이 야외에 잘 어 울린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이 쓴 ‘한국 도시락의 역사’( 125호)에는 1962년 6월 에 실린 ‘우 리 집의 도시락 반찬’이라는 제목의 사고(社告)가 소개됐 다. 도시락 식단을 공개 모집한다는 글이었다. “여러분 댁에선 아기들과 남편의 도시락 반찬으로 무엇을 넣어 주고 계십니까? 허구한 날 싸줘야 하는 도시락의 반찬 은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어머니들의 마음을 애쓰게 해 주는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맛있고 영양분 많은 것, 그러면서도 국물이 안 흐르는 것, 볼썽사납지 않은 것… 그래서인지 독자들(주부) 가운데 보내오는 소식을 보면 여러 주부들이 자기 집의 ‘도시락 반찬’ 만드는 방법을 공 개하여 서로 알고 싶다는 요망이 태반입니다.”

‘국물이 안 흐르고 볼썽사납지 않은 것’
윤선혜씨는 생채소보리비빔밥을 싸면서 매년 여름 어머니와 마주 앉아 비벼 먹던 보리비빔밥을 생각했다. 윤씨에게 도시락은 “새벽녘 주방에 선 엄마의 뒷 모습”이다. 부즈펌 제공

윤선혜씨는 생채소보리비빔밥을 싸면서 매년 여름 어머니와 마주 앉아 비벼 먹던 보리비빔밥을 생각했다. 윤씨에게 도시락은 “새벽녘 주방에 선 엄마의 뒷 모습”이다. 부즈펌 제공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늘의 도시락은 “허구한 날 싸줘 야 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날에 싸는 것이 되었다. 이제 엄마들은 도시락 만드는 방법을 신문에 기고하는 대신 온 라인상에서 공유한다. 요리 사이트 ‘82쿡닷컴’에는 캐릭 터 도시락, 독특한 메뉴의 도시락 제작기가 올라오면 댓글 반응이 뜨겁다. 소시지에 칼집을 내 프라이팬에 튀겨 문어 모양을 만들고 검은깨와 달걀 흰자를 이용해 눈을 새겨넣 고, 모양을 잡아 뭉친 밥 위에 김을 오려 눈·코·입을 만들 어 붙이는 수고는 기본이다. 캐릭터 도시락, 유기농 도시 락, 채식 도시락 등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도시 락을 선보이는 블로거들도 눈에 띈다.

도시락에 깃든 마음을 추억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도 시락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직접 도시락을 챙기기 버 거운 이들은 주문형 도시락에 눈길을 돌린다. 직장인 이 은경(30·가명)씨는 요즘 출근길에 샐러드 도시락을 챙 긴다. 동료들과 함께 한 달간의 다이어트 목표를 세우고 도시락 배송업체에 주문했다. 학창시절 매일 아침 어머 니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현관에서 받아갔다면 요즘은 누군가 이른 아침 문 앞에 걸어두고 간 가방 안에서 도 시락을 꺼내간다. 지난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다이 어트 도시락 업체 ‘런치포유’ 마케터 오승균씨에 따르면 “20대 후반~30대 중반 여성들이 주요 소비층”이라고 한 다. 샐러드와 닭가슴살 등으로 구성된 도시락은 매일 아 침 보냉가방에 담겨 집 앞에 배달된다. 이씨는 “어머니께 부탁하거나 직접 싸는 것이 번거로워 주문했는데, 도시락 배송 업체들이 주제별로 꽤 다양하게 분포돼 있어 놀 랐다. 다이어트가 끝나면 다른 종류의 도시락을 주문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깨끗하게 비워온 도시락통을 보며 이른 아침의 고단함을 조금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누군 가는 그런 어머니 마음으로 좋아하는 이에게 도시락을 선물하기도 한다. 미국 경제지 은 지난 해 한국에서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에게 도시락 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라며 상세히 소개했다. 매체는 “한국에서 도시락을 선물하는 게 진정한 팬을 가리는 잣 대가 되고 있다”며 “아이돌 스타를 위한 도시락 전문업체 도 생겨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조공 도시락’이다.

매일 아침 누군가 집 앞에 도시락을 놓고 간다. 20~30대 여성이 주요 소비층인 배송 도시락 업체들은 시장을 세분화하며 세를 불리는 중이다. 런치포유 제공

매일 아침 누군가 집 앞에 도시락을 놓고 간다. 20~30대 여성이 주요 소비층인 배송 도시락 업체들은 시장을 세분화하며 세를 불리는 중이다. 런치포유 제공

팬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스태미나식

주문제작 도시락 업체 ‘캐치도시락’을 운영하는 박윤 희씨는 지난 14년간 꾸준히 누군가의 팬이었다. 서태지 와 아이들에서 출발해 요즘 빠져 있는 그룹은 트루로맨 스다. 그러니 박씨는 팬들의 애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잘 먹고 힘을 내줬으면 좋 겠다는 거죠. 음식을 선물하는 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팬들이 선물하는 도시 락의 메뉴는 대부분 스태미나식이다. 전복·대하·소갈 비 등을 이용한 요리가 단골 메뉴다. 모처럼 준비한 음 식이니만큼 재료는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마련한다. 여러 명의 팬이 특별한 마음으로 준비하다보니 주문은 섬 세하고 때로 까다롭기도 하단다. 연예인이 좋아하는 메 뉴를 파악하고, 도시락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기획사와 조정하는 등 따져야 할 것도 많다. 다른 선물처럼 시간을 두고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준비하는 처지에 서도 애가 쓰이긴 마찬가지다. 예컨대 아침 6시 발송이 목표라면 그 전날 밤 10시부터 준비해 밤새워 음식을 만 들어야 하는 식이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무대를 함께 만 드는 스태프를 위한 도시락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기 본이 50~60인분이다. 박씨는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도시락”이라고 말했다.

주문제작 도시락을 판매하는 수지킴씨는 “도시락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 여러달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팬덤에서 출발한 도시락 선물 문화는 “잘 먹고 기운을 내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했다. 수지킴 제공

주문제작 도시락을 판매하는 수지킴씨는 “도시락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 여러달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팬덤에서 출발한 도시락 선물 문화는 “잘 먹고 기운을 내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했다. 수지킴 제공

방송인 강호동의 팬인 지인에게서 3년 전 우연히 도시 락 제작을 주문받은 뒤 독특한 포장과 담음새로 이름 을 알리기 시작한 수지킴( 저자)씨는 자신의 도시락을 ‘감성 도시락’으로 명명했다. 그는 “한 그릇 음식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서 도시락은 음식 이상의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애틋한 마음을 대신 전하는 만큼 제작에는 공 이 많이 들어간다. 유기농 식재료상과 직접 거래한 재료 만 사용하고 때때로 제작 기간이 아주 길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동방신기 유노윤호 팬들에게서 주문받은 도시락 은 만드는 데 무려 석 달이 걸렸단다. 주문받은 사람의 이미지에 따라 도시락을 기획하고, 메뉴를 정하고, 포장 부터 반찬 구성까지 팬들과 의견을 조율하다보면 그 정 도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단다. 박씨와 수지킴씨는 공통 적으로 팬덤에서 출발한 도시락 선물 문화가 점차 확산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인, 자녀의 학급 친구들, 부모님 등 특별한 날에 도시락으로 대접하는 이들의 주문도 꾸 준히 늘고 있다고 전했다.

향수와 추억의 새로운 역사

화려한 식탁을 작은 상자 안에 압축한 오늘의 도시락 들은 어쩌면 한 편의 시다. 강준만은 ‘한국 도시락의 역 사’에서 일제시대부터 2000년대까지 도시락에 새겨진 이야기를 풀어내며 “도시락의 역사는 가정, 가사노동, 라이프스타일, 교육 등이 어떻게 변화돼왔는가 하는 역 사와 만난다. …사람이 먹고살아야 하는 한, 도시락 이 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향수와 추억 의 도구이던 도시락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냉파스타로 도시락을 싸면
소풍 도시락 마니아의 여름 추천 메뉴
영진닷컴 제공

영진닷컴 제공

도시락은 사실 도시락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맛 있다. 같은 음식도 도시락에 넣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먹는 이에게는 함정, 싸는 이에 게는 비법이다. (영진 닷컴 펴냄)의 저자 김지혜씨가 진짜 비법을 공 개했다. 이른바 TPO(Time(시간), Place(장소), Occasion(상황))에 따른 메뉴 선정. 날씨가 쌀 쌀할 때는 양념한 고기를 넣은 유부초밥, 햄버 거 등이 어울린다면 더워지기 시작한 요즘에는 냉파스타가 좋단다. 김씨가 제안하는 파스타 샐 러드 만드는 방법.
❶ 얇게 썬 양파는 10분 정도 물에 담가 매운 맛을 제거하고 파프리카는 한입 크기로 썬다.
❷ 달걀을 삶아 적당한 크기로 썰고 베이컨을 바삭하게 구운 뒤 잘게 썬다.
❸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푸실리·로텔레 등 짧은 파스타를 8~10분가량 삶은 뒤 차가운 물에 헹군다.
❹ 준비한 재료와 잎채소, 콘옥수수를 담고 오리엔탈드레싱, 칠리소스, 다진 할라페 뇨, 케첩을 섞은 드레싱을 넣고 버무린다.
❺ 도시락 용기에 담고 파르메산치즈를 뿌린 뒤 차갑게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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