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풋내기 의사가 얻어낸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

등록 2013-03-08 17:40 수정 2020-05-02 19:27

로버트 매클레이의 조선 답사 결과를 보고받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가 선교사를 파견하려고 분주히 움직일 즈음, 북장로회도 여러 경로로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던 이수정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이수정의 세례에 입회했던 북장로회의 G. W. 녹스는 이 경이로운 소식을 본국 선교부에 알리며, 선교부가 경비를 대준다면 자신이 직접 조선을 방문해 선교길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교파’에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의학 공부 1년6개월에 임상 경험도 없어
188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먼저 농학자 쓰다 센을 포함한 일본인 신자 두 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쓰다의 친구이기도 한 이수정이 일본인을 통한 조선 선교에 강경히 반대했을뿐더러, 쓰다도 조선 선교는 시기상조라고 보고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상호 간의 뿌리 깊은 ‘반감’을 확인한 선교본부는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게다가 그들은 조선어가 일본어보다 중국어에 훨씬 더 가깝다고 착각했다.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F. F. 엘린우드는 중국 산둥 지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 방안에 대해 숙고해달라고 요청했다. 바로 자원자가 나섰으나 산둥 지부의 일치된 의견은 아니었다. 산둥 지부 선교사들 다수는 ‘조선 선교에 나서는 것보다는 산둥 지부를 튼실하게 꾸리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선교부는 애써 중국어를 습득한 선교사들을 다시 조선에 보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1884년 2월, 조선 선교 자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두 달 뒤, 북장로회는 테네시의 젊은 의사 존 W. 헤런을 조선 선교사로 지명했다. 그러나 헤런은 더 완벽한 ‘의료 선교사’가 되려고 조선행을 미뤘다. 그러는 사이에 예상 밖의 일이 생겼다. 1883년 4월 중국 의료 선교사로 임명된 호러스 뉴턴 앨런이 임지를 변경해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앨런은 오하이오의 웨슬리언대학 신학과와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의학을 공부한 기간은 1년6개월에 불과했고 임상 경험도 없었다. 그는 산둥 지부에서 물러날 S. A. D. 헌터의 자리를 채우고 일하며 더 배울 예정이었다. 1883년 10월 앨런이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 그의 아내가 병에 걸렸다. 상하이에 있던 ‘동료 의사’는 따뜻한 상하이에서 겨울을 나는 편이 환자에게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앨런은 그 말에 따랐지만, 이미 선교사들이 충분히 많은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풋내기 의료 선교사가 할 일은 없었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일자리를 준 것은 마침 상하이에 와 있던 난징 지부 선교사들이었다. 앨런은 아내와 함께 난징으로 이동해 그곳 지부의 일을 도우며 산둥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헌터는 자리를 비워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에게 상하이에서 사귄 동료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외아문 협판 겸 총세무사 묄렌도르프와 인천 해관 세무사 A. B. 스트리플링에게 전달할 추천서까지 써주었다.
과거 매클레이 안보다 후퇴한 안 제시

복원된 중명전.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바로 옆에 있다. 이 건물이 들어선 대지가 바로 매클레이가 점찍어둔 곳이자 앨런의 집터였다. 호러스 G. 언더우드, 존 W. 헤런, 찰스 C. 빈턴 등 앨런의 뒤를 이어 서울에 들어온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모두 이 집 주위에 모여 살았다. 전우용 제공

복원된 중명전.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바로 옆에 있다. 이 건물이 들어선 대지가 바로 매클레이가 점찍어둔 곳이자 앨런의 집터였다. 호러스 G. 언더우드, 존 W. 헤런, 찰스 C. 빈턴 등 앨런의 뒤를 이어 서울에 들어온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모두 이 집 주위에 모여 살았다. 전우용 제공

앨런은 본국 선교부에 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고, 선교부는 그의 임지 변경을 승인했다. 1884년 9월22일, 서울에 들어온 앨런은 먼저 일자리를 찾았다. 미국 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는 공사관 ‘무급 의사’ 자리를 주었고, 묄렌도르프는 해관 촉탁 의사 자리를 약속했다. 서울에 서양인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안 이 풋내기 의사가 자신감을 느꼈을지 두려움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중국에는 그의 자리가 없었다. 그는 매클레이가 푸트 공사에게 사달라고 부탁해두었던 바로 그 집을 차지하고 매클레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푸트 공사도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 때문에 감리교의 조선 선교 계획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푸트 자신이 장로교 신자였던데다 이때에는 이미 조선을 떠날 결심을 굳힌 상태여서 선교본부 구입 문제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를 데려오려고 상하이로 돌아갔던 앨런이 서울에 다시 온 것은 양력 10월27일이었고, 한 달쯤 뒤인 12월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서울과 제물포를 오가며 소일하던 앨런은 그날 밤 묄렌도르프에게서 급히 자기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국왕의 총신이자 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사경을 헤매는 중에 몇몇 한의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우정국 낙성식에 참석했던 묄렌도르프가 칼에 맞은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뒤 부른 한의들이었으나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풋내기 젊은 의사가 아는 치료법도 많지 않았으나, 한의학에는 아예 외과가 없었다. 다행인지 요행인지 민영익은 소생했고, 그는 일약 신의(神醫)가 되었다. 민영익은 ‘우정의 표시’로 그에게 10만냥을 주었다. 푸트가 미국 공사관을 설치하려고 지급한 돈이 2만냥이었으니, 당당한 저택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민영익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앨런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물론 고종은 몇 달 전에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비록 ‘역적질’을 하다 일본으로 도망쳤지만, ‘무료로’ 서울에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하겠다던 매클레이의 제안은 고종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서양의학의 신통함은 민영익이 나음으로써 이미 입증된 바였다. 미국의 의술과 의료 사정에 대한 의례적인 질의응답이 오간 뒤, 앨런은 과거 매클레이가 했던 제안보다 후퇴한 안을 제시했다. 국왕이 병원을 지어주면 자기는 무료로 진료할 것이며 함께 일할 동료들을 더 데려올 수 있다고.

미국 개신교 선교기지 만들어져

상황을 분명히 정리하면, 고종은 ‘부탁’하지 않았다. 왕은 지시하고 허락할 뿐 누구에게도 부탁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앨런이 병원을 ‘지어주면’ 무료로 봉사하겠다고 부탁했고, 고종은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신청하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했다. ‘역적’ 홍영식의 집이 병원으로 개조됐고, 뒤이어 이 병원에 미국 감리회와 북장로회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조선의 서양식 국립병원이자 미국의 개신교 선교기지인 제중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전우용의 서울탐史’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