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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정상가족’을 외치다

동거 커플 지민과 철이가 육아를 위해 법적 결혼을 하며 만난 결혼 제도의 균열과 변화… 셀프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선>
등록 2012-03-03 07:49 수정 2020-05-02 19:26
영화 <두 개의 선>은 가부장적 결혼을 자연스레 거부하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인칭 시점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이자 주인공 지민(왼쪽)과 철이. 시네마 달 제공

영화 <두 개의 선>은 가부장적 결혼을 자연스레 거부하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인칭 시점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이자 주인공 지민(왼쪽)과 철이. 시네마 달 제공

‘두 개의 선’은 임신테스터의 임신 표시줄을 말한다. 영화 속 지민은 10년 동안 임신테스터의 반응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마다 “이번만 아니게 해주세요, 제발” 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은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29살 지민과 36살 시간강사 철이가 동거 2년 만에 ‘두 개의 선’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는 셀프다큐멘터리 영화다.

“일반적 결혼생활? 동의 못해”

이들이 결혼이 아닌 동거로 사는 이유는 뭘까? 연애 6년 만에 철이가 청혼했을 때, 지민은 “그냥 같이 살자”고 했고, “둘의 차이를 모르겠던” 철이는 “그냥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결혼과 동거의 차이가 혼인신고나 결혼식 유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민은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동거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의견을 밝힌다. ‘일반적인 결혼’이 뭘까?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민의 친구들은 ‘반상기’ 같은 혼수나 ‘내 살림을 하는 재미’ 등을 말하고, 철이의 친구들은 ‘여자와 아이에게 울타리가 돼주는 것’이라 말한다. 지민과 철이는 고민 끝에 아이는 낳되, 결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려는 이들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지민의 부모님이다. 지민의 부모님은 함께 노동운동을 했다. 지민을 임신한 어머니는 떠밀리듯 결혼했고, 아버지의 수배와 수감 생활 동안 어머니는 노조사무실에서 일하며 육아와 생계를 책임졌다. 지민이 1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결혼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며 집을 나갔고, 그 뒤 10년간 형식적인 결혼관계를 유지하다가 3년 전에 이혼했다. 어머니는 지민이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안다. “한 가지를 타협하면 열 가지를 타협하게 되고 결국 똑같아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지민에게 ‘정상가족’은 의식적으로 거부해야 할 무엇이자, 무의식적으로는 투항하고픈 안온한 것이기도 하다. 지민은 결혼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이 아이를 핑계로 흐려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본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 철이 역시 결혼에 부담감을 느낀다. 그는 결혼을 통해 집안이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가장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는 경제력이 없는 자신이 사회적인 가장의 역할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자아 손상감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기르겠다는 그들의 저항은 난관에 부딪힌다. 아이는 선천성 질환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아이의 건강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지민은 자신이 아이를 원치 않았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약해진다. 게다가 선천성 질환에 대해 정부의 수술비 지원을 받으려면 제도적인 결혼이 필요했다. 제도의 차별에 직면한 이들은 결국 투항해버린다. 철이는 비겁한 패배였다고 자평하고, 지민은 혼인신고를 통해 불안감을 떨쳐버리려는 욕망이 있었음을 실토한다. 이들은 혼인신고를 하고, 엄마의 성을 쓰는 것도 포기한다. 지민은 젖을 먹이는 행위를 통해 모성을 확인받으며,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와 점차 전통적인 성역할을 더 많이 하고 있음을 씁쓸히 털어놓는다. 결국 두 사람은 공고한 결혼제도 앞에서 패배하고 만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영화는 끝까지 성찰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사실적이고 솔직한 고백을 통해, 결혼의 실체와 그 균열을 심도 있게 파고든다.

다른 주체들이 오고 있다!

은 동거,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20~30대 이성애자 남녀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고민의 지점들을 묘파해나간다. 주인공인 지민과 철이는 자신의 가족사와 성의식, 결혼관, 심지어 무의식까지 어떠한 치부나 금기 없이 카메라 앞에 벗어놓는다. 이들은 동거와 결혼 사이를 끈질기게 버티며, ‘결혼의 정상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결혼은 비혼과의 차별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는 국가제도이자, 우리의 무의식에 작용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도록 만드는 끈질긴 이데올로기다. 영화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이를 확인시키며, 동시에 결혼제도가 이미 심각한 균열을 맞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가지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남성 노동자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해짐에 따라 가부장적 결혼을 거부하는 남성 주체가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철이처럼 생계노동을 통한 가족 부양이라는 성역할을 자기 삶의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남성이 결혼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부모 세대의 결혼관 변화다. 지금 20~30대의 부모 세대는 1997년 외환위기와 가족 해체를 겪으며 이혼율의 상승을 몸소 겪었다. 또한 1980년대 초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이 부모 세대로 유입됨으로써, 부모의 결혼관 역시 크게 변화했다. 얼마 전까지는 젊은 여성 혼자 결혼 앞에서 버티다 상대 남성과 부모의 등쌀에 투항해버리는 꼴이었다면, 이제는 상대 남성과 부모 모두 다른 욕망을 지닌 주체로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민과 철이, 지민의 어머니는 결혼의 절대성을 반쯤 걷어낸 사람들이다. 다른 주체들이 오고 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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