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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니 에미가 아니다

<짝패>부터 <욕망의 불꽃>까지 드라마의 오랜 트렌드 ‘출생의 비밀’…
진부한 설정 넘어 주제를 드러내는 장치로 진화하다

제853호
등록 : 2011-03-24 11:34 수정 : 2011-03-2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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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는 친부모와 친자식을 찾는 이들의 눈물바람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신분이 뒤바뀐 남자들이 저잣거리를 뛰어다니고(<짝패>),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친모를 원망하는 여자의 매서운 눈빛이 카메라를 쏘아본다(<가시나무새>). 주말이 되면 사연 많은 이들의 얘기는 더 다양해진다. 병원에서 뒤바뀌어 남의 집에서 살아온 여자(<반짝반짝 빛나는>), 거듭되는 친자 확인으로 지친 부자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녀(<욕망의 불꽃>), 친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여자(<신기생뎐>)까지 모두 ‘출생의 비밀’을 하나씩 품고 있는 곡절 많은 인생이다.

수십 년 동안 반복돼온 공식

‘출생의 비밀’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십 년 동안 반복돼온 공식이다. 문화평론가 ‘듀나’의 홈페이지(djuna.cine21.com)에 있는 ‘클리셰 사전’에도 이와 관련된 항목이 있다. 1980년 제작된 영화 <스타워즈>에서 검은색 가면을 쓴 다스 베이더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외친 대사 “내가 네 애비다”(I’m your father)에서 따온 ‘나는 네 엄마다’라는 클리셰로 통칭한 출생의 비밀 공식에 대해 듀나는 “대부분 끝없이 줄줄 이어지는 갈등 관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된다”며 이렇게 정리한다.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지금까지 숨겨져왔던 혈통 관계가 밝혀진다고 해서 그들의 명분이 바뀌는 것도, 시드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야무진 동물은 아닙니다. 엄청난 혼란이 따라오죠. 그들이 그 발견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건, 더 증오하건, 혼돈은 필연적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정리하는 데 상당한 페이지가 소요되고 따분해진 시리즈는 구원받습니다.”

〈욕망의 불꽃〉(위부터), 〈짝패〉, 〈반짝반짝 빛나는〉. 문화방송 제공

친모와 친부에 관한 비밀은 특히 국내 드라마가 자주 사용하는 장치다. 언니의 출생 비밀을 가로채 남의 삶을 사는 동생의 이야기를 다룬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진실>(1984), 자신이 낳은 딸을 의붓아들과 결혼시키는 엄마가 등장한 임성한 작가의 <하늘이시여>(2005)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장치의 장점은 듀나의 설명처럼 필연적인 128혼돈과 혼란, 또 엇갈린 운명 등으로 인해 드라마에 극적인 요소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 덕분에 긴장감이 살아나고 집중력은 저절로 높아진다. 그러나 새롭지 않은 설정과 구성으로 사용할 경우 ‘뻔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김선영 TV평론가는 “작가가 줄거리만으로 드라마를 끌고 나갈 힘이 없을 때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에 의존해서 질질 끌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며 “그 비밀을 주변 인물 1이 알게 하고, 그다음엔 주변 인물 2가 알게 하고, 또 주변 인물 3이 알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연장하며 똑같은 갈등을 반복한다”고 말했다.

‘뻔하다’는 단점에도 이렇게 많은 드라마가 동시에 출생의 비밀이라는 장치를 안고 세상에 나온 건 시청자의 눈과 감정을 사로잡기에 이만큼 효과적인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주인공의 극적인 ‘운명’,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포장된다. 국내 드라마는 주인공의 운명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을 즐기고, 시청자는 그에 반응한다. 그런 이상 출생의 비밀은 국내 드라마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최근 출생의 비밀이 드라마에 대거 등장했다. 앞서 설명했듯 일주일 동안 방영되는 드라마의 대부분이 출생의 비밀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일부 차용하고 있다. 몇몇 작품은 여전히 출생의 비밀을 진부하게 사용한다. 여주인공 단사란(임수향)이 알고 보니 부잣집 딸이라는 뻔한 설정의 SBS <신기생뎐>과 보습학원 원장 김갑수의 잃어버린 딸이 학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윤승아라는 비밀을 전혀 궁금하지 않게 만드는 문화방송 시트콤 <몽땅 내 사랑>이 그렇다. 반면 <짝패>나 <반짝반짝 빛나는>, <욕망의 불꽃>은 출생의 비밀을 조금 새롭게, 또 조금 다르게 사용한다.

비슷한 설정, 다른 결말

<짝패>와 <반짝반짝 빛나는>은 뒤바뀐 운명이라는 비슷한 설정으로 출발한다. 용마가 우는 밤에 태어난 아기는 훌륭한 장수가 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죽는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충청도 용마골에서 한날한시에 두 아이가 태어난다. 양반집 아들 귀동(이상윤)과 노비 아들 천둥(천정명)이다. 천둥의 엄마인 막순(윤유선)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사망한 귀동에게 젖을 물려주고 양반집 유모로 들어간다. 그러나 막순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아들 천둥과 귀동을 바꾼다. 그렇게 천둥과 귀동은 양반과 거지의 상반된 삶을 살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에서는 산부인과에서 같은 날 태어난 여자아이 둘의 뒤바뀐 운명을 그린다. 부러울 게 없는 출판사 사장 딸로 자라난 정원(김현주)과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온 고시식당집 딸 금란(이유리)은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서로가 바뀐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인 <짝패>는 신분제가 엄격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 드라마를 통해 양반과 거지라는 멀고 먼 신분의 격차를 출생의 비밀이라는 뒤바뀐 운명으로 정면 돌파한다. 모두가 양반이라고 믿는 아이는 사실 노비의 핏줄이고, 한낱 거지인 아이는 양반의 핏줄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양반의 핏줄인 천둥이 ‘의적’이 되는 과정을 그려낼 예정이다. 드라마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만들어가는 데 천부적 재능을 보여주는 김운경 작가의 작품인 만큼 출생의 비밀을 설정해놓은 의도는 새롭다. 보통 출생의 비밀을 사이에 두고 대립각을 세우던 뒤바뀐 운명의 주인공들이 이 드라마에서는 서로 ‘짝패’가 되어 활약한다는 내용은 더욱 그렇다. 천둥과 귀동은 각각 의적과 정의로운 포도부장으로 함께 뛴다. 둘의 운명은 바뀌었다기보다 애초에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그려내는 방식에서는 어느 정도 진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Red천둥은 양반의 핏줄이기 때문인지 거지임에도 능력이나 품성, 배움에 대한 의지까지 남다르다. 출생의 비밀에 숨겨진 ‘높으신 유전자’ 때문에 뛰어날 수밖에 없다는 ‘선천적 주인공론’을 잘 보여준다. <선덕여왕>의 덕만(이요원)이 그랬고, <제빵왕 김탁구>의 탁구(윤시윤)가 그랬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정반대다. 주인공의 환경적 요인, 그러니까 ‘후천적 주인공론’을 얘기한다. 출판사 사장인 아버지 아래서 해맑게 커온 정원은 출판사 팀장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철없는 아버지와 억척스러운 어머니 아래서 고생하며 자라난 서점 직원 금란은 삶에 비관적이다.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 경제적 고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은 금란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원점으로 돌려놓으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정원은 이 사실에 당황한다. 이 드라마의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의 결말에 와서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만능 열쇠로 출생의 비밀 카드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 카드를 초반에 펼쳐놓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주인공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뒤바뀐 운명이나 되찾은 인생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집중한다. 아직 드라마 초반이지만, 아마도 이 작품은 삶이란 유전자나 운명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임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욕망이 엇갈리고 부딪치는 교차로

출생의 비밀을 가장 흥미롭게 끌고 가는 드라마는 <욕망의 불꽃>이다. <욕망의 불꽃>은 제목이 드라마 자체다. 모든 등장인물에게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뚜렷한 욕망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그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하게 움직인다.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욕망을 따라 드라마는 거의 마지막까지 왔다.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을 강렬한 욕망으로 끌고 간다.

<욕망의 불꽃>은 크게 두 개의 출생 비밀로 움직인다. 하나는 백인기(서우)의 출생이다. 출세를 향한 윤나영(신은경)의 욕망과 버스회사 사장 아들 박덕성(이세창)의 여자를 향한 욕망이 만난 결과물이 백인기다. 그러나 인기는 태어나자마자 나영의 언니인 윤정숙(김희정)에 의해 버려진다. 그러나 친모인 나영의 욕망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기는 집을 나가 최고의 여배우가 된다. 대서양그룹의 손자 김민재(유승호) 역시 또 다른 비밀의 주인공이다. 인기가 낳자마자 죽은 줄 알고 있던 나영은 성공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대서양그룹의 아들 김영민(조민기)과 결혼한다. 그러나 난산으로 인기를 낳고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나영은 남편 영민의 내연녀인 양인숙(엄수정)의 아들 민재를 데려다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갈등은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인기와 민재가 사랑에 빠지고 이 둘을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시작된다. 출생의 비밀은 서로의 욕망이 엇갈리고 부딪치는 복잡한 교차로다.

이 드라마의 독특한 점은 출생의 비밀을 대하는 등장인물의 태도다. 나영은 인기가 자신의 친딸임을 알고도 끌어안고 울기보다 자신에게 해가 될까 경계하며 ‘낳은 정’을 꾹꾹 눌러놓는다. 감정적 소비보다 정치적 계산이 앞선다. 인기의 친아버지인 사채업자 덕성도 마찬가지다. 영민은 민재가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자 민재에 대한 미움을 드러낸다. <욕망의 불꽃>이 출생의 비밀을 이토록 다르게 그리는 이유에 대해 김선영 TV평론가는 “이 드라마는 욕망과 욕망의 원죄의식, 잘못된 욕망으로 인한 윤리적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룬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은 사랑에 의한 윤리적 출생이 아닌 어긋난 욕망의 결과로서의 출생이다. 그래서 모성이나 부성의 문제가 거론되기보다 그 딜레마 속에 있는 인물의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출생의 비밀에 연관돼 있는 건 인기와 민재지만 그 밑그림에는 대서양그룹 김태진(이순재) 회장의 부를 향한 끊임없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김태진 회장은 5명의 남매를 두고 있지만 그들 중 영준과 영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모가 다르다. 김 회장이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그룹을 세우며 부를 축적해나가는 과정은 김 회장의 가족이 구성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그룹과 관련된 일종의 거래 때문에 아들로 삼은 영식이나 여배우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미진(손은서), 그룹을 위해 정략결혼으로 들인 둘째 며느리 남애리(성현아), 자신이 특허권을 빼앗은 친구의 딸인 셋째 며느리 나영까지 모두 탐욕의 결과물이다. 예순을 훨씬 넘긴 노장 정하연 작가는 드라마에서 가장 뻔한 설정조차 이렇듯 명확한 주제의식을 갖고 이토록 치밀하고 치열하게 밀고 나가면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는 걸 직접 보여준다.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법

출생의 비밀은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창작 딜레마의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그 딜레마에서 탈출할 방법은 있다. <욕망의 불꽃>과 <짝패>, <반짝반짝 빛나는> 등의 드라마가 보여주듯 할 얘기가 없어서 출생의 비밀을 억지로 끼워넣는 게 아니라 하려는 얘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출생의 비밀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된다. 이게 우리가 이들 드라마에 주목하는 이유이자 앞으로 나올 수많은 드라마에 전하고 싶은 얘기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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