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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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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편의 ‘헌정 소설’ 모은 <더블>로 찾아온 황금 복면의 사나이, 박민규를 만나다
등록 2010-12-30 08:35 수정 2020-05-02 19:26

지난 12월21일, 코끝이 따뜻해 어색한 겨울밤이었다. 서울 홍익대 근처에 불 밝힌 카페와 식당 안의 사람들은 하염없이 소파에 엉덩이를 비비며 저물어가는 한 해를 더 길게 늘리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런 밤, 그 평화로운 기운을 굽이굽이 풀어내 그 사이에 앉아 다음날이 없을 듯 책을 읽고 싶은 밤, 박민규를 만나기로 했다.

<더블>의 저자 박민규가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더블>의 저자 박민규가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당신의 타이틀과 나의 타이틀은 다르다

번화하고 안온한 거리를 지나 당인리발전소 방향으로 꺾어들었다. 골목은 한 발짝만큼씩 더 어두워졌다. 과 인터넷 서점 알라딘, 창작과비평사가 공동 주최한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많은 이들이 그 어두운 골목을 더듬어 ‘만남의 장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커먼 골목 어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박민규는 조도가 낮은 그 거리에서 행여나 사람들이 자신을 못 찾을까, 황금색 복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복면을 벗지 않은 채 그는 단이 없는 공간에서 독자와 같은 눈높이의 의자에 앉았다. 박민규의 목소리는 오래된 집 창틀에서나 보았던 불투명한 유리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탁하고 때때로 발음이 불분명했다. 미처 유리를 투과하지 못한 빛처럼 웅얼거리는 말들은 책 속의 반듯한 활자와는 사뭇 달랐다. 화려한 금색 마스크와 낮고 차분한 목소리의 동떨어짐은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보게 하는 그의 문장들, 웃음 또는 고민을 유발하는 소설 속 엉뚱한 상황들과 닮아 있었다.

화두는 역시나 최근에 나온 (창작과비평사 펴냄)이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더블’이다. 딱딱한 상자 사이에 두 권의 책이 끼여 있다. 책에는 그동안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단편 24편 중 18편이 담겼다. 장편소설 과 를 내놓고 올해 초 ‘아침의 문’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자신의 이런저런 근황을 알려왔지만 여러 지면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정리하고 묶은 단편집은 이후 5년 만이다.

책의 구성에 대해 박민규는 ‘LP’ 시절의 그리움을 담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책은 그 시절의 LP처럼 사이드A와 사이드B로 나뉜다. 일러스트가 그려진 속지는 당시의 그것과 닮았지만 더 세련됐다. 그는 “18곡의 트랙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작품이 읽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블>

<더블>

그렇다면 그의 사운드트랙을 흐르는 작품 중 타이틀곡은 무엇일까. 힘 빠지게도 작가는 꼭 하나 집어서 말하지 않았다. “특별한 하나는 없다. 읽는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타이틀을 하나 꼽으면 될 것”이라며 대답을 독자의 몫으로 넘겼다.

그러나 맥없다 느껴졌던 대답은 이후 다른 말들을 통해 그 뜻이 완성된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바 의 모든 단편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쓴 것이다. 특정인을 지정한 헌정작을 쓴 계기를 묻자 그는 “진심을 담기가 편한 것 같아서다. 대상이 막연할 때는 진심을 담기가 힘들다. 정말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라는 생각으로 쓴다. 전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만 표현하는 기분으로 쓰는 거다. 그리고 믿는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무리 독특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수만 명은 있겠지, 그래서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그 비슷한 수만 명이 즐겁게 글을 읽을 수 있겠지, 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더없이 속을 썩인 아들이 작가가 되던 2003년 갑자기 세상을 뜨셨던” 아버지에게 바치는 ‘누런 강 배 한 척’,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구글의 창시자 래리 페이지와 서지 브린에게 주는 ‘끝까지 이럴래?’, 버락 오바마 이후에 나타날 미국 대통령을 위해 쓴 ‘루디’ 등은 이들 중 누군가를 똑 닮은 독자를 향한 선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특정 짓는 어느 하나는 없지만 작품집을 읽다 보면 독자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맞춤한 ‘타이틀’을 찾을 수 있으리란 얘기다.

“현실과 환상이 짝을 이뤄 세상을 만든다”

이날 모임에는 그의 등단(2003년) 동기이자 ‘절친’ 소설가인 천명관도 함께 자리했다. 사이드B에 실린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박민규가 천명관에게 주는 글이다. 원래는 영화배우 존 굿맨에게 주려고 쓴 소설인데, 글을 쓴 직후 작업실에 천명관이 놀러와 “(존 굿맨이 출연한) 야말로 마치 내 인생을 얘기한 듯한 영화였어!”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마음을 고쳐먹었단다. 코언 형제의 는 순수하게 작품성을 지키려는 시나리오 작가와 그에게 상업성을 강요하는 할리우드 제작자 사이의 갈등을 그린 영화다. 존 굿맨은 영화에서 영업사원으로 나오는데 박민규가 보기에 영화 속 그는 “너무 뚱뚱해서 보기에 안쓰럽다”. ‘딜도가…’에서도 주인공이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나오는데, 거구에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 멀리 화성까지 가며 온몸을 던져 영업에 매진한다. 여러 지점이 맞닿아 ‘딜도가…’는 를 닮았고 그래서 이 작품은 에 출연한 존 굿맨에게 헌정될 뻔했으나, 천명관이 를 좋아한다고 소리친 덕분에 결국 박민규의 ‘절친’ 천명관을 위한 것이 된 것이다. 돌고 도는 헌정사 또한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천명관은 박민규의 글에 대해 “문학만이 가능한 대범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상상할 수 있는 것에서 슬쩍 더 뛰어 넘어갔을 때의 쾌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깬 것 같은 느낌을 박민규의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대범한 상상력의 작가’ 박민규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짓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처럼 두 가지가 함께 이 세상을,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인체를 보라. 정형화돼 보이지만 자꾸 확대해 들어가다 보면, 그러니까 마이크로의 세계에서 보면, 우리 인체도 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거대한 공간 같은 것 아닌가.” 시선의 지점에 따라 현실이라 생각했던 것이 환상, 환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가까운 예도 든다. “내 친구의 아내가 자신의 아이가 특목고에 가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건 현실일까, 환상일까. 우리는 살아 있지만 밤이 되면 잔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나라는 자아는 어디 갔다 오는 걸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번 작품집엔 처절하게 현실처럼 들리는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에게 헌정한 ‘누런 강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이 소설에 대해 “아버지가 납득하실 만한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딜도가…’ 같은 소설을 읽고는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실 거다. 미술로 치자면 아주 기초적인 석고 데생을 하는 기분으로 글을 썼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노인의 시선을 그린 이 소설은 관념적인 것만 같던 삶과 죽음이 현실에 바짝 다가온 것에 관한 통찰을 차분하게 담고 있다.

사색·위무·거침없는 상상력의 공존

‘근처’ 또한 그런 작품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회사에 전념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결국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묻어뒀던 보물상자를 찾아 꺼내보며 생을 정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화의 끝 무렵 박민규가 낭독한 ‘근처’의 부분을 활자로 전한다. “사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더 힘든 저녁 나절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그의 작품집은 사색과 위무와 거침없는 상상력이 동시에 교차한다. LP판 위에 올려진 작은 바늘이 여러 음악을 그려내듯 어느 낮과 밤 타이프를 치고 있었을 그의 손가락 끝도 록과 발라드와 재즈와 헤비메탈을 오가는 이야기들을,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지어내고 있었나 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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