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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커밍아웃!

드라마 <개인의 취향> <인생은 아름다워>의 게이들…

‘거대한 벽장’ 한국 사회에서 TV가 ‘당신 주위의 게이’를 알려드려요
등록 2010-05-13 06:48 수정 2020-05-02 19:26

한국 사회는 거대한 벽장(closet)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주변에 동성애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거꾸로 동성애자에게는 숨어 있기 좋은 방이었다. 한국은 서른이 넘은, 아니 마흔이 가까운 비혼의 남녀가 있어도 별로 그를 동성애자로 의심하지 않는 사회였다. 이렇게 거대한 침묵의 벽장에서 침묵을 깨는 물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 한국의 핑크(동성애자 상징색) 문화는 먼저 케이블을 타고 왔다.

약방의 감초 같은 조연으로

텔레비전 커밍아웃!

텔레비전 커밍아웃!

케이블 채널을 돌리면 어디서나 그들이 보인다.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 있는 외국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에는 출연진과 심사위원 가운데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성소수자가 넘쳐난다. 몇몇은 커밍아웃도 했는데, 의 지도교수인 팀 건 같은 이들이다. 멀리는 ‘여성 절친인 게이’를 한반도 여성의 머리 속에 각인한 가 있었다. 패션·뷰티 등에 관련된 한국산 프로에도 성소수자 이미지는 적잖게 보인다. 그러니까 스타일 좋고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는 좋은 친구 게이의 이미지는 바다 건너 ‘아메리카’의 얘기만은 아니다.

핑크색 케이블은 두 가지 연결선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가 바다 건너로 연결된 선이라면, 또 하나는 서울 강남으로 연결된 선이다.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어쨌든 케이블 방송은 강남 문화를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방송을 만드는 제작진과 출연진 가운데 외국 경험을 한 이가 많아서, 이들에게 익숙한 성소수자 코드가 아무래도 자주 나온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들이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은 문화적인 만큼 상업적이다. 또 우아하고 세련된 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미드(미국 드라마)가 더해진다. 차우진 평론가는 “요즘 미드에 나오는 동성애자 캐릭터는 1980년대 미국 시트콤의 흑인 같다”고 요약했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조연이란 것이다. 이렇게 의 현경이 연애를 글로 배웠다면, 한국의 시청자는 동성애를 방송으로 배운다.

예전엔 스타가 성별의 경계를 넘으면 대중적 인내의 한계도 건드렸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완벽하게 성별을 넘어설수록,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할수록 환호를 받는다. 더구나 외국에서 퀴어(동성애) 코드로 해석될 만한 여지가 있는 것도 여기선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냥 요즘 유행인 조금 이상한 남자애, ‘똘기’ 있는 애로 여길 뿐이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요즘엔 남성적 여성이든 여성적 남성이든, 이른바 ‘에지’가 있는 아름다움이면 괜찮다고 여긴다”고 분석했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의 경계가 무너지고 아름다움으로 통합됐단 것이다. 더구나 몇 번 클릭만 하면 그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란 사실까지 명확하니, 함부로 대놓고 딴죽 걸다간 ‘촌스럽다’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기존의 남성성을 벗어난 캐릭터를 찾는다면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케이블을 타고 온 핑크 바이러스는 지상파로 확산됐다. 마침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과 SBS 주말드라마 에 나란히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다. 은 주인공 전진호(이민호)가 게이로 오해받는 설정에서 시작했다. 전진호는 사업상 필요로, 그를 게이로 오해하는 박개인(손예진)과 같은 집에 살게 된다. 게이로 오해받는 매력남 진호가 연애엔 숙맥인 개인의 연애 코치가 되고, 익숙한 드라마 문법에 따라서 이들은 교육을 가장한 ‘연애질’을 이어간다. 진호가 게이가 아니란 역커밍아웃을 하려 할 때마다 가로막는 장벽이 생기고, 드라마는 중반이 넘어설 때까지 게이와 여성의 관계를 ‘끈질기게’ 유지했다.

그리하여 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여성의 판타지, 여성의 ‘베스트프렌드’ 게이가 재현됐다. 개인은 진호와 친구라도 좋으니 평생을 같이 살고 싶다고, 진호에게 평생의 방패막이가 돼주겠다는 결심까지 한다. 게이와 여성의 플라토닉한 사랑이란 환상이다. 한편 진호가 게이로서 당하는 일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청자는 이미 진호는 진짜 게이가 아니고, 그가 게이로 겪는 일들은 거짓의 세계라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이렇게 은 개념 없이 천진하거나 끝없이 쿨하다.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 박기호 사무국장은 “달라진 남성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성애자 남성으로 설정하면 한계가 있다”며 “기존 남성성을 완전히 탈피한 캐릭터를 그리려면 오해를 받든 아니든 동성애자 캐릭터가 유용하다”고 지적했다. 오해받는 게이라는 편한 설정을 통해 진호는 극단적 초식남이 되어도 무방하다.

이렇게 게이인 ‘척하는’ 캐릭터만 있으면 진정성이 의심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에는 드라마 중반에 ‘진짜’ 게이가 나왔다. 아니 기존 캐릭터 가운데 한 명인 최 관장(류승용)이 커밍아웃을 한다. 류승용의 디테일을 살린 연기는 뻔할 수도 있던 최 관장 캐릭터를 살렸다. 최 관장은 평소엔 과묵한 성격이지만, 진호 앞에만 서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멋있거나 너무 멋없거나, 극단의 두 줄기만 있던 한국 드라마의 게이 캐릭터에 오랜만에 등장한 현실감 있는 인물이다.

마침내 가족 드라마에도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다. 김수현 작가의 에 나오는 태섭(송창의)은 집안에서 ‘특별한’ 아들이다. 맏이에 의사에 훈훈한 외모에 깔끔한 성격까지, 김수현 드라마의 ‘엄친아’ 요소는 두루 갖췄다. 그런데 서른넷이 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 경험도 변변히 없다. 그를 좋아하는 동료 의사 채영(유민)이 있지만, 태섭은 남자인 경수(이상우)에게 끌린다. 사진작가인 경수는 태섭의 여동생이 한눈에 반해버린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다. 박기호 친구사이 사무국장은 “태섭과 경수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훈훈한 게이 커플”이라고 말했다. 1970~80년대부터 한국 사회 가족상의 변화를 반영해온 김수현 드라마에도 게이가 등장했다. 이렇게 게이는 달라진 가족을 상징하는 요소가 되었다.

가족 드라마에도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고, 게이로 오해받는 주인공이 나온다. 〈인생은 아름다워〉, 〈개인의 취향〉(왼쪽부터).

가족 드라마에도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고, 게이로 오해받는 주인공이 나온다. 〈인생은 아름다워〉, 〈개인의 취향〉(왼쪽부터).

‘훈훈 커플’ 기대, 의심은 더욱 많아질 것

태섭이 자신을 좋아하는 채영에게 커밍아웃하는 장면은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여기에 채영과 경수가 동시에 태섭의 집에 와서 생기는 어색한 기운 등 이전의 가족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던 장면들이 에 나왔다. 전혀 여성스럽지 않고, 극단적으로 스타일리시하지도 않은 태섭과 경수의 모습은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쪽에서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고 있다. 이종걸 친구사이 인권팀장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통해서 좀더 평범한 이들이 동성애자를 제대로 알게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서도 “시청자 게시판 등에 올라오는 반발을 보면서 잠복돼 있던 동성애 혐오증이 얼마나 거대한지도 함께 느낀다”고 말했다. 동성애자 사이에도 이들 훈훈한 커플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이제는 나를 (동성애자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더욱 많아질 것 같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렇게 케이블을 타고 와서 지상파로 확산된 핑크 문화는 한국 사회를 거대한 침묵의 벽장에서 커밍아웃의 바깥으로(coming out of closet) 이끌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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