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레드 기획

골목길, 그곳엔 삶이 있었네

뉴타운·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정겨운 공간들의 채록 작업 활발
‘문자와 사진으로 옮겨지는 기억들’

제786호
등록 : 2009-11-19 14:20 수정 : 2009-11-19 15:34

크게 작게

골목길, 그곳엔 삶이 있었네
공간에는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는다. 오래된 장소일수록 간직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600년의 역사가 깃든 서울은 낡은 집을 허물고 세련되게 변하면서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다. 고층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 바람이 동네와 삶의 오랜 흔적들을 지운다.

가벼운 주머니로 빈대떡과 막걸리를 즐길 수 있던 서울 청진동 피맛골도 오는 12월이면 사라진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뒤 철거가 진행된 이곳에 현재 남은 가게는 겨우 일곱 집. 기름 냄새 고소한 빈대떡을 부쳐내는 ‘열차집’, 석쇠에 바짝 구운 생선구이가 일품인 ‘대림식당’ 등도 모두 흩어질 예정이다. 서울 곳곳에서 재개발사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피맛골처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삶의 공간들이 없어지고 있다.

고유색 잃고 아파트 단지로 변하는 동네들

이렇게 동네 고유의 색을 잃고 고층 건물과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공간에 대한 비판과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오래된 동네를 기록하는 작업이 여러 곳에서 진행 중이다. 부서지고 새로 채워질 공간을 토박이들의 기억을 빌려 기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기억이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사라져가는 동네를 기록해 민속지를 발간하고 있다. 2007년 한남뉴타운, 2008년 가재울뉴타운이 민속지의 대상이 됐다. 책엔 주민들의 일상부터 낡아빠진 살림살이까지 모두 기재돼있다. 이제 곧 사라질 마지막 풍경, 동네에 대한 오랜 기록은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 흥미롭다.

가재울뉴타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서울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 이곳은 예전부터 모래가 많아 ‘모래내’로 불렸다. 땅을 파면 모래가 많이 나와 공사하는 사람들이 모래를 팔아 건축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재개발로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민속지에 가재울에 대한 기억을 쏟아놓았다.


2005년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서울 북아현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재개발 바람은 동네와 삶의 오랜 흔적들을 지운다. 문화우리 제공

“옛날에 아마 홍수가 많이 났을 때 모래가 엄청나게 많이 쌓인 모양이야. 비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모래가 많았어. 이름이 모래내 아니예요. 여기 보면 땅만 파면 모래가 그렇게 깨끗한 게 많이 나와. 그거 가지고 공사비도 많이 도움을 받고 그러지. 하수도 물이 밖에다 빼놓으면 저절로 빠져버려. 그렇게 모래내가 아주 유명한 모래내야.” (김창옥·79세)

“송장뼈를 얼마나 내왔는지 몰라. 뉴타운 되어 밀면 뼈다귀 꽤 나올 거예요. 공동묘지였거든.”(이보금·70세)

도시의 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다. 한 달 남짓이면 사라질 청진동처럼 새롭게 태어날 동네는 서울시에 모두 35곳이다. 가재울·왕십리·길음동 등 ‘뉴타운’ 혹은 ‘균형발전촉진지구’라는 이름으로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인 곳들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올해 아현·길음·돈의문·왕십리·청진동 피맛골을 기록했다.

가쁜 삶 살아온 이들의 살아 있는 증언

기록 작업은 문헌 조사, 건물 실측조사, 인터뷰 등으로 이뤄진다. 가장 알짜배기 정보는 사람을 통해 나온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오문선 학예사는 “보통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세상은 이렇게 달라졌고, 역사는 이래서 발전했구나를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고 말했다.

고층 빌딩을 병풍 삼아 섬처럼 남아 있는 청진동 피맛골 식당의 주인들은 한 달 남짓이면 버리고 떠나야 할, 기름 때 달라붙은 낡은 식당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자식이 효자가 아니라 생선이 효자야. 여기서 30년을 장사했응께. 생선 팔아 아들 영국으로 유학 보내고, 결혼도 시켰지. 우리 집 단골 중에 고 정주영 현대 회장도 있어. 사람은 참 소박한데 돈 쓰는 건 후하더라고. 맛있는 것 다 내놓으라 해서 모둠생선을 갖다주면 갈 때 밥값보다 두 배 이상 돈을 주고 갔어. 밥값 빼고 남은 돈은 식당 아주머니들이 1만원씩 나눠가졌지.”(대림식당 석송자 사장)

공공미술이 마을 안 골목길로 들어왔다. 북아현동에 위치한 추계예술대 미술학부 학생들이 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역을 주제로 다양한 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무교동 매운 낙지는 내가 원조”라는 92살 낙지센터 사장님은 서울 재개발 열풍의 산 증인이다. 종로 일대에서만 떠밀려 네 번 이사를 했다. 청진동 피맛골 재개발로 또다시 이사를 준비하는 그는 “이번에는 꼭 이사 안 해도 될 곳으로 옮기겠다”고 했지만 그 바람이 이뤄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사라지는 동네와 골목의 기억은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기록으로 오롯이 보존된다.

채집한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길음동은 일제시대 때 대규모 매장지였다. 공동묘지를 이장하고 서울시가 택지 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빈민들이 무허가 건물을 지어 정착했다. 하지만 빈촌의 대표였던 길음동도 2003년 뉴타운 시범지역이 되면서 변해가고 있다. 더 높은 빌딩이 지어지며 빈촌의 이미지를 지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민속학을 연구하는 기록자들에겐 특색 없는 동네로의 변화가 아쉬움을 남긴다.

“없어지니 기록하러 왔네” 반기는 주민들

오문선 학예사는 “지역 내부자로서 보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없어졌으면 하는 공간일 수 있지만 바깥에선 의미 있는 공간이기에 그 지역의 옛날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기록 작업을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면 “다 없앤다고 해놓고 뭘 기록하느냐”는 주민들의 반발이 많았지만, 이제는 “없어지니 기록하러 왔구만” 하면서 살림살이를 꺼내 보여주는 이들이 늘었다. 기록하는 사람도, 기록을 위해 기억을 더듬어주는 사람도 사라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을 함께 나눠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기록하는 민속학이 농어촌에 이어 도시를 주목한 것도 도시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장상교 학예사는 “민속이란 것이 결국 사람들 이야기인데 산업사회 이후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도시민속학 연구가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아현동에 이어 올해 서울 정릉3동을 들여다보고 민속지를 만들었다. 재개발 지역은 아니어도 외지고 정적인 분위기인 정릉3동은 사람들의 종교·생활 면에서 민속 조사지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배밭골, 국민대학교 뒤쪽 757번지 일대 등으로 나눠 살펴본 마을은 주민들이 매년 산신제를 올릴 만큼 무속신앙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산신제가 유명해. 1년 열두 달 무사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월 초하루에 지내지. 요 근래 들어 구청장이니 뭐니 다 와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해가고 그래. 옛날엔 제물로 돼지머리를 올렸지. 시방은 간단하게 하려고 해. 60년대까지 돼지를 잡았어. 주소 올리고 이름 써서 소지 올리고… 산신령한테 지내는 거지.”

“정릉3동 시장에서 그 아래 현재 아파트(현진빌라)까지가 넓은 공터였는데 그곳은 ‘냉쩡개’라 불렀어. 거기 운동장이 어릴 때 마당이 넓어 ‘찜뿌’하고 놀았지. 지금 야구 형태나 마찬가지야. 사람이 (공을) 주먹으로 쳤어. 야구랑 똑같애.”

오는 12월이면 청진동 피맛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기름 냄새 고소한 빈대떡을 부쳐내는 ‘열차집’, 석쇠에 바짝 구운 생선구이가 일품인 ‘대림식당’ 등도 모두 흩어질 예정이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

40년 역사를 지닌 이곳 스카이아파트의 반장수첩을 보면 1990년대 초반의 생활이 엿보인다. 1991년 8월분 스카이아파트 3동 상하수도 요금은 27만5040원. 수첩엔 이 금액을 세대별로 머릿수를 계산해 나눠 놓은 요금 내역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수도세·전기세를 분배하는 게 그 당시 반장의 중요한 임무였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연구원들은 이 지역 조사를 위해 1년을 누볐다. 석 달간은 반지하 월세방에 세들어 살며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봤다. 밖에서 본 것, 안에서 본 것들이 꼼꼼히 민속지에 기록됐다. 현재의 모습이지만 곧 과거가 될 풍경들이 많았다. 국립민속박물관 김현경 연구원은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고 잊어버리면 서글프지 않냐”면서 “도시개발을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월세방 세들어 살며 생활 체험하기도

도시에선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 외형적인 변화에 집착해 600년의 역사를 잃어가는 서울의 위기도 읽힌다. 골목을 걷기 시작한 도시 산책자들의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서울시 종로구는 골목에 대한 관심이 늘자 도심 내 골목길을 걸어보는 답사 코스를 만들었다. 한옥이 밀집한 가회동은 한옥체험코스로,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이 있는 교남동은 역사·문화 기행코스로 만드는 등 다양한 테마를 가진 골목길 코스를 내년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김현경 연구원은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빨래를 너는 법과 좁은 길 주차법 등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곳”이라며 “의식주의 모든 게 있어 ‘문화 백화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기록자들에게도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모래가 많아 ‘모래내’로 불리던 가재울, 빈민촌으로 알려졌던 길음동에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제 곧 사라질 마지막 풍경, 동네에 대한 오랜 기억들은 민관단체와 민속지에 고스란히 문자와 사진으로 남게 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역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마을과 공동체를 예술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지역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공공미술이 마을 안 골목길로 들어왔다.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추계예술대 미술학부 학생들은 지난 11월6일부터 10일까지 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역을 주제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골목에서 주름잡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를 위해 학생들은 동네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며 동네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허름한 벽과 계단이 화폭이 되고, 골목길이 무대가 된 퍼포먼스가 이뤄졌다.

도시문화를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문화우리’도 북아현동을 주목한다. 2005년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이곳은 현재 재개발조합 설립을 마치고 재개발을 눈앞에 두었다. 이 동네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도 40년 역사를 뒤로하고 곧 철거될 예정이다. 문화우리는 주거환경 개선을 명분 삼아 한 도시에 축적된 기억이 깡그리 지워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도시경관을 기록하고 있다. 이름하여 ‘도시경관 기록보존 프로젝트’다.

북아현동 골목길을 사진으로 남기는 공개 답사에 참여했던 아키비스트(기록보관인) 이인환(37)씨는 평소 예쁘게만 보던 골목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부독재 시절부터 개발을 환영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노인들을 골목에서 만나면 이분들은 한결같이 ‘아파트에 들어가면 죽는 거와 같다’며 반대하시더라고요. 참 아이러니죠. 위에서부터 지시된 재개발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참여해 지역 특색에 맞게 마을을 변화시켜가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수지 않고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더 나은 도시 문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문화우리의 북아현동 공개 답사에서 답사 길잡이로 나섰던 한지원(39)씨는 사라지는 동네에 대한 아쉬움으로 기록 작업에 참여해보니 “재개발 프리미엄만 볼 게 아니라 문화적 가치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뛰놀던 동네가 신축 아파트 단지로 남아 있기보다 온기나 형태가 남아 있으면 그것 자체가 귀한 일 아닌가요.”

획일적 도시개발 줄이는 계기 되길

문화우리의 동네 기록작업은 ‘한지역한생활사박물관’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지역한생활사박물관은 동네의 색이 묻어나는 구역을 있는 있는 그대로 보존지역으로 남겨두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우리 이중재 사무국장은 “부분만 봐도 전체를 알 수 있는, 동네의 특색 있는 구역만이라도 보존해 서울의 역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의 기록 작업이 도시개발을 할 때 시행착오를 줄여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 이어지고 어우러져야 도시·동네·골목에 깃든 삶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다. 박현수 영남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우리나라의 도시개발은 있던 것을 없애고 가짜로 만들어 돈 버는 장사를 하고 있다”며 “사라지는 모든 걸 소중하게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고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21>과 함께해주세요
<한겨레21>은 후원자와 구독자 여러분의 힘으로 제작됩니다. 광고 수입이 급감하면서 저널리즘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독립적인 재정만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더 나은 사회를 제안하는 심층 보도를 이끕니다. <한겨레21>의 가치와 미래에 투자할 후원자를 기다립니다.
문의
한겨레21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후원
https://cnspay.hani.co.kr/h21/support.hani
구독 신청
http://bit.ly/1HZ0DmD 전화신청(월납 가능) 1566-9595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