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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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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삔 꽂는 오빠’들의 유쾌한 놀이판


게이 코러스 ‘G-Voice’ 10월24일 서울 대학로서 공연…
보수화돼가는 사회에 똥침을 날리는 다양한 레퍼토리들
등록 2009-10-23 09:42 수정 2020-05-02 19:25

“어머, 얘가 또 ‘삔’ 꽂게 만드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언니들’이 술자리에서 ‘어린 것들’이 열받게 만들면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해온 농담이다. 이른바 ‘칠공주’ 언니들이 ‘맞장’ 뜨러 갈 때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리기 좋도록, 거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교복 치마 아랫단에 ‘삔’(핀)을 꽂으면서 생겼다는 전설의 관용구는 이렇게 새로운 용례를 얻었다. 게이(남성동성애자)로 살면서 남몰래 심장에 삔을 꽂게 되는 분통 터지는 현실이 없다면, 이 농담은 그토록 통쾌한 ‘메타포’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 수절 아니 수양을 하면서 삔을 허벅지를 찌르는 데만 썼던 언니들이 다시 머리에 삔을 꽂고 나선다.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게이 코러스(합창단) ‘지_보이스’(G_Voice) 20명이 단체로 머리에 삔을 꽂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연에 참여하는 ‘지_보이스’ 단원과 스태프. 왼쪽부터 이종헌, 박기호, 미르, 전재우, 천정남씨.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공연에 참여하는 ‘지_보이스’ 단원과 스태프. 왼쪽부터 이종헌, 박기호, 미르, 전재우, 천정남씨.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소수자 인권이 이슈조차 안 되는 현실에 화”

공연의 제목인 ‘삔 꽂는 날’은 10월24일 저녁 7시30분. 삔 꽂고 맞장 뜰 상대는 일찍이 대통령 후보 시절에 “동성애는 반대”이라는 어록을 남기신 청와대의 그분. 이종헌 지_보이스 단장은 “이 정권 들어서 소수자 인권이 이슈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화났다”고 삔을 꽂은 이유를 말했다. 전재우 단원도 “사회의 보수화가 소수자 차별로 이어지는 상황이 행동에 나서라고 부추긴다”고 거들었다. 마침 매카시즘 열풍을 타고 뉴욕 게이바 단속에 나선 경찰에 저항해 일어난 스톤월 항쟁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그래서 지_보이스는 스톤월 항쟁을 기념해서 만들고, 이번 공연에서 부르는 에서 “누구든 나를 비웃으면 파이트(Fight)/ 누구든 날 다치게 하면 아웃(Out)/ 삔 꽂고 달려와 립스틱 던지며 엉덩이 흔들며 싸워라”라고 노래한다. 제아무리 열심히 싸우는 자도 즐겁게 싸우는 자를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어쩌면 지_보이스는 합창단을 가장한 쇼단이다. 이들이 지금껏 해온 공연의 영상을 보면, 물론 합창이 중심이 되지만 박장대소가 터지게 만드는 아는 노래의 리믹스, ‘꺄악∼’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발칙한 퍼포먼스, 를 무색하게 만드는 과감한 노출로 ‘쇼쇼쇼’의 명성을 쌓아왔다. 2008 정기공연 ‘네이키드’(Naked)에선 망사 ‘난닝고’를 걸치고 나와서 솔직한 게이 라이프의 속살을 드러냈다. 여기에 배우 예지원씨가 백설공주 드레스를 입고 나와 을 부르면서 지_보이스와 입을 맞추는 깜짝 출연이 더해졌다. 2007 ‘게이풀 선데이’(Gayfull Sunday)는 게이로서 끼와 자긍심을 마음껏 발산하는 공연으로, 지_보이스를 ‘동인녀’(동성애 만화·소설·영화 등을 즐기는 여성들)들의 오빠, 레즈비언의 귀염둥이 반열에 올렸다. 전재우 단원은 “‘게이들 공연’ 자체가 커밍아웃을 포함한 사회적 메시지지만 지금까진 공연에 게이적 감수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며 “여기에 사회적 메시지를 더한 이번 공연은 역대 최고의 난이도”라고 말했다.

게이적 감수성에 바탕, 사회적 메시지도

이들이 무엇을 노래하는지 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들린다. 지_보이스는 ‘삔 꽂는 날’ 무대에선 게이로 알려진 클래식 음악가들의 음악, 커밍아웃한 게이 대중음악가들의 노래, 게이들의 삶을 담은 창작곡 그리고 유행가와 민중가요까지 부른다. 이들은 널리 알려진 노래에 게이적 감수성을 더해 살짝 비틀기도 하지만, 세상에 게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노래가 거의 없으니 직접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 이번 공연에선 “아오~ 아오~” 하는 ‘끼스러운’ 추임새가 들어가는 같은 경쾌한 노래도 나오고, ‘뽕짝’풍의 도 부른다. 친구사이 주현미로 불리는 ‘갈라’ 단원이 부르는 는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이 거리 누군들 슬프지 않으리”라는 흐느낌으로 절정에 오른다. 친구사이 뒷방 늙은이(오래된 회원)이자 지_보이스 단원이며 종로 게이바 사장이자 이 노래의 작사가인 천정남씨는 “너만 애인 없고, 너만 슬픈 거 아니니까 청승 떨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지는 는 원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어둠의 거리”로 시작되지만, 게이 버전은 “아 캄캄한 저 차별의 거리”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동성애 반대세력이 개신교란 사실이 오래된 노래에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지난해 ‘지_보이스’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한 예지원씨가 지_보이스 단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왼쪽). 올해 공연의 포스터(오른쪽/G_Voice 제공).

지난해 ‘지_보이스’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한 예지원씨가 지_보이스 단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왼쪽). 올해 공연의 포스터(오른쪽/G_Voice 제공).

이렇게 10곡이 넘는 창작곡에 1장의 미니앨범까지 만든 지_보이스는 2003년 친구사이 소모임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을 시작으로 해마다 정기공연을 열어왔다. 대중적이고, 예술적이며, 인권 지향적인 합창단의 꿈은 여전히 현재형. 그러면 왜 하필 합창단일까? 일단 게이에 대한 관심(혹은 감시)의 촉수가 있는 나라에선, 합창단을 하는 남자는 게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마치 피겨스케이팅, 발레를 하는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것처럼. 이런 의심을 증명하듯, 자유로 이름난 도시엔 반드시 게이 코러스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암스테르담·뉴욕, 이름만 들어도 머리에 꽃을 꽂게 되는 도시에는 전문 합창단 뺨치는 유명한 게이 코러스가 있다. 지금껏 지_보이스 공연의 관객은 게이가 절대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게이들의 영원한 손님인 동인녀들이 기본으로 자리를 메워주시고, 여성활동가들도 뒤집어지며 공연을 즐긴다. 여기에 약간의 동성애자 가족과 다수의 이성애자 친구들이 박수를 더한다. 지_보이스로 나와서 공연을 해도 커밍아웃, 심지어 이들의 공연을 보러 와도 커밍아웃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잖다. 그래도 공연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입단하는 게이도 있다.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든 나의 노래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공연을 앞두고 서너 달은 매주 일요일 노래만 8시간, 뒤풀이 5시간의 강도 높은 연습을 하는데, 그래도 커밍아웃의 두려움으로 무대에 서기를 망설이는 단원들이 있다. 그때마다 지_보이스 언니들은 “무대에 서는 것도 인권운동”이라고 충고한다. 상당수는 노래하는 맛을 만끽하다 인권운동에도 맛들인다. 현재 단장인 이종헌씨는 지_보이스에 노래하러 왔다가 2006년, 2007년에 친구사이 대표까지 하게 됐고 현재도 인권팀장을 맡고 있다.

친구사이 홈페이지 등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많은데, 지_보이스는 게이 커뮤니티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비로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입구도 된다. 올해 들어온 가브리엘 단원은 “이전에는 어떤 게이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며 “양질의 게이 커뮤니티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애인 따라 친구사이에 나왔다가 지_보이스에 정착한 미르는 “노래도 재밌지만, 사람들이 더 재미있다”고 덧붙였다. 게이 모임이 대부분 연령대로 나눠지는데, 지_보이스에는 20~40대까지 섞여 있어 다양한 얘기를 듣고 배운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_보이스는 외롭게 종로를 헤매는 몇몇 게이의 팔자를 바꾸었고, 음치에 박치인 단원들의 음악 인생도 바꾸었다.

‘끼스러운 한 방’이 보고 싶다면

끝으로 스포일러를 누설한다. 올해의 오프닝 영상은 김조광수 감독이 만든 퀴어 영화 의 꽃미남 주인공 서지후, 이제훈이 등장한다. 앙코르곡은 소녀시대의 , 물론 그냥 부르진 않는다. 몸이 몹시 말랐다고 해서 ‘개말라’로 불리는 전재우씨가 재편곡해 무언가 ‘끼스러운’ 한 방을 날린다. 전씨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부디 많이들 오시라”고 당부했다. 항간엔 지_보이스가 꽃미남 반, 훈남 반이란 루머도 있다. 게다가 공연이 무료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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