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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노동 OTL’

경제 호황기 가난한 자들의 만화경, 데이비드 K. 쉬플러의 <워킹푸어>
등록 2009-10-23 05:03 수정 2020-05-02 19:25
〈워킹푸어〉

〈워킹푸어〉

현재 캐롤라인의 인생을 정산해본다면 마이너스다. 잘해봐야 ‘0’이다. 그가 게으름을 피웠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의사가 “가능한 한 하룻밤 동안 일을 쉬고 휴식을 취하라. 누워서 다리를 쉬게 하라”는 말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의사 말을 듣고 공장에 전화했다가 그는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 캐롤라인이 거쳐온 직업을 적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대학 때는 보모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처음 정식으로 구한 직장은 플라스틱제 담배 라이터와 질레트 면도기날 케이스 공장이었다. 사교클럽 지부 잡일과 상점 파트타임을 동시에 하고, 봉제공장 봉제일, 홈리스 시설 직원, 탐브랜즈 탐폰 공장, 클레어몬트 저축은행 서류 정리를 했다.

5년6개월, 집 팔아 남은 건 1센트도 안 되네

미국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K. 쉬플러가 (후마니타스 펴냄·2005)를 위해 그를 만났을 때는 대형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과 계산대 일을 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승진은 생각도 못했다. 미소가 ‘재산’인 직장에서 미소를 보일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치아가 곪거나 썩어 모두 들어내서다. 메디케이드(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부의 공적 의료 부조)에서는 치아가 하나도 없는 경우에만 보험이 적용되었다. 틀니를 공짜로 얻었으나 구강 구조와 제대로 맞지 않아서 조정해야 했다. 그만한 돈이 없어서 틀니를 빼고 생활한다. 그에게는 학습장애가 있는 딸이 있다. 쉬플러를 만났을 당시에는 준학사를 마치고 노숙인 시설을 나와 집도 구해 있었다. 여러 번의 만남(데이비드 쉬플러는 인터뷰 대상 한 사람당 12회나 15회, 20회씩 만났다)을 거치는 동안 캐롤라인은 딸을 맡아줄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해서 집을 팔았다. 이 집의 명세는 그의 삶을 요약해준다. 3만7천달러에 집을 사서 5년6개월 만에 7만9천달러에 팔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돈은 1센트도 안 됐다. 최초의 모기지론으로 3만4천달러, 두 번째 모기지론으로 1만9천달러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나마 마이너스가 되지 않은 것은 부동산 업자가 수수료를 깎아줘서다. 이것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의 삶이다.

“세차장에서 일하는 그 남자에게는 정작 자기 차가 없었다. 은행에서 지급 완료된 수표를 정리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통장에 남은 돈이라고는 고작 2달러 2센트뿐이었다. 의학 교과서 원고를 교열해주고 시급을 받는 한 여성은 10년 동안 치과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쉬플러의 가난한 삶 르포는 1997년 미국의 최고 번영기에 시작되었다. 가난의 원인을 알기 위해 5~6년간 지속적으로 참여관찰을 실시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빈곤선을 기준으로 약간 낮거나 약간 높은 생활을 하고 있다. 빈곤의 경계선에서 빈곤을 들여다본 것이다. 하지만 그 경계의 아등바등한 삶은 미국 정부 통계의 허구도 들여다보게 한다. 정부는 1993년 15.1%에서 2000년 11.3%로 빈곤율이 낮아졌다고 말한다.

책은 1930년대 스타인벡의 나 도로시아 랭의 사진을 보는 듯하다. 난감하게도,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대기업의 부도덕을 나열하는데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의 원인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난 농장주, 작은 공장 사장, 매니저, 케이스 워커, 빈민활동가,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만화경의 한 풍경으로 자리잡는다.

“미국 사회에서는 빈곤의 원인이 매우 불명확하며 따라서 그 해결책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미국인들이 가진 신화는 ‘최하층에서 태어나더라도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신화는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을 제공하기도 한다. 청교도 전통에 따르면 근면은 실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하이오주의 노동자 크리스티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벌을 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곤 한다”고 말한다. 웬만한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하루 만에 기진맥진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는 “게으름, 나태함”이라고 대답한다.

잔혹한 현장의 부러운 제도

눈에 밟히는 것은 이런 잔혹한 현장에서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은 제도들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1장은 근로장려세제라는 추가 급부금을 가로채는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이 근로장려세제라는 추가 급부금이 대단한 수준이다. 몰라서 그렇지, 근면하게 일하고 신망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증명한다면 주택 모기지론을 받을 수 있다. 불법 이민자도 납세 신고를 하면 세금 환급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국세청이 이민국에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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