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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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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지 말아라, 만덕이 있다

등록 2008-07-30 15:00 수정 2020-05-02 19:25

흉년을 맞은 제주도에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한 18세기 후반의 스타, 천민 여성 만덕의 삶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두 해 전 새로운 화폐 도안을 만들 때 제주도에서는 김만덕(金萬德·1739~1812)이라는 18세기 후반의 여성을 넣자고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제주 출신에다 천민 신분으로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고 그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한 의로운 행적이 제주를 상징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로 만덕을 꼽는 데는 이견을 내놓기가 어렵다.

천민 신분으로서 이렇게 큰 인물로 추앙받는 근거는 설득력을 지닐 만큼 충분하다. 행적이 과 , 에까지 등장하고, 정조와 왕비 그리고 당대의 정승인 채제공을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그를 만나보고 시와 산문을 써서 그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은 1790년대 후반에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한 유명한 사건이었다. 천민 여성이 이렇게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은 아주 드물다. 에 만덕의 행적이 담긴 것은 자연스럽다.

스무 살쯤 기생 벗어나 돈벌이 나서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제주에는 그를 기리는 사업회가 결성돼 활동 중이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글과 책이 여러 종 출간됐다. 사대부 여성이나 일반 여성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인물 형상으로서 만덕의 이미지는 지금도 생성 중이다.

먼저, 만덕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의 삶을 채제공의 에 기대어 살펴보자. 그는 제주의 기생이었다. 본래 양민의 딸이었으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기생집에 몸을 붙였기에 나이가 들자 기생이 되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관아에 눈물로 호소해 기적(妓籍)에서 벗어났다. 양민이 된 뒤에는 제주의 남자를 촌스럽게 여겨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덕은 돈을 버는 재주가 있었고, 특히 물가 변동을 잘 알아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사고팔아 십수 년 뒤에는 이름이 날 정도로 돈을 모았다.

기록에 따라 다르기에 만덕이 기생 신분을 벗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기녀에 과부로 행세했으며, 장사를 잘해 거부로 알려졌다. 그런 만덕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은 제주의 흉년 때문이었다. 제주에는 1792년 이래 잇따른 흉년과 태풍의 피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1794년에는 바람과 해수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인 심낙수(沈樂洙)가 9월17일과 10월23일에 연달아 구휼미 2만 섬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다. 상황이 심각하자, 1795년 윤2월에 조정에서는 5천 섬의 구휼미를 내려보냈다. 그런데 쌀을 실은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하자 만덕은 가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다가 백성들을 구휼해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했다. 1796년 정조 20년 11월25일의 일로 실록을 비롯한 조정의 사료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정조 임금이 만덕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목사에게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했을 때, 만덕은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대궐에 들어가 성인의 모습을 우러러본 뒤 금강산에 들어가 비로봉 꼭대기에 올랐다가 만이천봉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신분 상승이나 세금 면제와 같은 실질적 요구가 나오는 것이 상식일 텐데 기대 밖의 엉뚱한 소원이었다.

원래 제주 여자는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오지 못했고, 더욱이 평민 여자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덕의 소원은 그런 엄한 금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엉뚱한 답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소원대로 해주라고 하명했다. 내의원 소속 여의(女醫)의 우두머리라는 임시 직책을 하사하는 방편을 써서 각 고을의 역참(驛站)에서 그를 호송케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만약 남자가 만덕과 같은 일을 했다면, 아마도 3품의 관복을 입고 만호(萬戶)의 인끈을 임시로 차게 하는 정도의 특전을 베풀었을 것이다. 정조는 만덕에게 특별히 융숭한 은혜를 베풀었다.

만덕은 1795년 겨울 서울에 왔다. 선혜청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급받았다. 궁궐에 나아가 중전과 세자빈도 알현했다. 세자빈은 “네가 여자의 몸으로 의롭게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라며 후한 상을 하사했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 관광 가다

기생이 왕에게서 이러한 대우를 받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만덕이 서울에 오자 일약 고관대작까지 만나보고 싶어 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정월 대보름에 만덕이 한양의 다리밟기 행사에 참여하자 채제공은 시에서 그 사실을 읊고 태평성대의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그야말로 명사로 대접받았다. 홍도(紅桃)란 기생은 만덕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다음 시를 지었다.

행수(行首) 의녀는 탐라의 기생이라(女醫行首耽羅妓)

만리 길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네.(萬里層溟不畏風)

이제 또 금강산으로 구경길 떠나며(又向金剛山裡去)

꽃 같은 이름 교방(敎坊)에 남기네.(香名留在敎坊中)

이듬해 봄에 만덕은 드디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국왕의 특명에 따른 여행이므로 일반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성대한 등산길이었다. 만덕은 서울에 돌아와서 다시 중전과 세자빈을 알현하고, 채제공을 비롯한 정승과 명사들을 두루 만나 그들로부터 방문을 기념하는 시문을 받아냈다. 채제공은 그의 소전(小傳)을 썼고, 이가환과 박제가는 시를 써주었다. 판서 이가환의 시는 이렇다.

만덕은 제주도의 기이한 여인!

나이는 예순이건만 얼굴은 마흔 살.

천금 같은 쌀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 구하고

배 타고 바다 건너와 임금님을 뵈었네.

소원은 한 가지로 금강산을 보는 것

금강산은 동북쪽 멀리 안개 속에 쌓여 있네.

성상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는 듯한 역말을 내려주시니

천리 길 빛나는 영광이 곳곳에 넘쳐흘렀네.

높은 봉에 올라 멀리 조망하여 눈과 마음 확 트이게 하더니

표연히 손을 흔들며 섬으로 돌아가네.

탐라는 아득한 옛날 고씨 부씨 양씨부터 비롯했는데

서울을 구경한 여자는 만덕이 처음이리라.

우레처럼 떠들썩하게 와서는 고니처럼 홀연히 떠나고

높은 기상을 길이 남겨 천하에 흩뿌렸네.

여성 의협(義俠)으로서 만덕의 기상을 몹시도 치켜세웠다. 만덕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드러난다. 그렇게 많은 사대부에게 얻은 시문으로 한 권의 시집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도 이 시권에 발문을 써주었다. 그 글에서 다산은 만덕에게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 곧 삼기사희(三奇四稀)가 있다고 말했다. 기생이 과부로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희사한 것,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한 것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겹눈동자를 가졌고, 종의 신분으로서 역말을 타고 왕의 부름을 받았으며, 기생으로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라고 했다. 만덕이 누린 호사가 당시로서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보여준다.

서울에 머물 때 만덕은 여러 일화를 남겼다. 이재채(李載采)의 에는 그가 서울에 머물 때의 일화를 두 가지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이렇다. 서울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돈이 굉장히 많은 과부라고 하여 만덕에게 바짝 접근했다. 그러자 만덕은 “내 나이 쉰이 넘었다. 저들은 내 얼굴을 곱게 봐서가 아니라 내 재물이 탐나서 저런다. 굶주린 자를 구할 여유도 없는데 어느 겨를에 저런 탕자를 살찌우랴?”라며 거절했다. 세상 사는 곳에는 언제나 남을 등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만덕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의협의 풍모가 넘쳐난다.

만덕이 얼마나 파란을 일으켰는지는 만덕이 겹눈동자의 소유자란 소문에서도 알 수 있다. 만덕의 눈 한쪽이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졌다. 겹눈동자는 한 눈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간 것으로 역사적으로 성인인 중국 고대의 순임금과 진한 교체기의 항우가 있다. 박제가와 조수삼 등은 그가 겹눈동자를 지닌 특별한 용모임을 부각시켰다. 박제가는 전생에 부처의 마음과 신선의 풍골이 있어서 만덕이 그런 특이한 상을 지녔다고도 말했다.

다산이 밝힌 ‘겹눈동자’ 소문의 진상

당시 이 소문이 크게 확산되자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다산이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만덕을 자기 집에 불렀다. 확인해 밝힌 뒤에 ‘겹눈동자의 변증’(重瞳辨)이란 한 편의 짧은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다산은 만덕이 물건을 두 개로 보지 않고, 가까이서 그의 눈을 보니 흑백(黑白)의 정동(睛瞳)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하면서 겹눈동자란 헛소문임을 밝혔다.

하지만 만덕 자신도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다산은 소문이 사라지지 않고 횡행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허탄(虛誕)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바보가 된다고 개탄했다. 이러한 뜬소문이 떠돈 것은 만덕이 일으킨 소동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한다.

만덕은 제주로 돌아가 살다가 1812년에 사망했다. 돌아간 뒤 제주에서 생활한 사연은 일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다. 묘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말자.

여성 의협(義俠) 만덕의 선행과 왕명을 받은 서울·금강산 여행은 당시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전설이 되었다. 홍희준(洪羲俊), 이희발(李羲發), 김희락(金熙洛), 유재건(劉在建) 등이 그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지었다.

만덕의 행적이 의협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당시 만덕이 일으킨 떠들썩한 소동을 지켜보면서 만덕이라면 침을 뱉는 제주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앞서 제주목사 심낙수가 기근을 구할 구휼미를 요청한 사실을 언급했다. 심로숭은 그의 아들로서 1794년 아버지를 뵈러 제주에 가 있던 몇 달 동안 주민들로부터 만덕의 사연을 자세히 들었다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남자의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마저 빼앗아서 그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는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육지에서 온 장사꾼들 가운데 만덕의 탓으로 패가망신하는 이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만덕은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음식을 구걸하는 형제도 돌보지 않던 만덕이 제주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바쳐서 한양에 이르고 금강산을 구경하고자 하였다. 만덕이 호탕한 말을 하여 여러 학사들이 전(傳)을 지어 칭송했다.

심로숭이 전하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덕의 행실과는 전혀 딴판이다. 심로숭은 소문과 실상이 서로 어긋난 사례로 만덕의 일을 들었다. 심로숭은 전을 지어 만덕을 칭송한 채제공과 같은 사람들이 만덕에게 기만을 당한 것으로 보고 싶었다. 심로숭은 만덕이 한창 행세할 때 제주에서 4개월을 지내면서 소문을 들었으므로 서울에서 만덕의 말만 듣고 판단한 다른 사람보다는 실상에 가깝게 사실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따르면, 어쨌든 만덕이 구휼미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만덕의 전모는 그렇게 선하지 않다. 한 번의 선행으로 만덕은 많은 것을 얻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평이 그에 합당하다. 심로숭의 판단에 따르면 그렇다.

과연 심로숭의 전언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느 쪽 말이 진실에 가까울까?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채제공과 이재채·정약용을 비롯해 만덕을 높이 평가한 사대부가 대체로 남인 계열이라면, 심로숭은 노론에 속한다. 서로 다른 평가에는 당파적 입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을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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