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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정말 제국이었나

등록 2008-01-24 15:00 수정 2020-05-02 19:25

토착 지배자들을 인정하는 간접지배, 문화권역도 넓지 않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자기 분열이라 할까? 우리는 통상 근·현대의 한국을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생각하고 일제든 미제든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을 논할 때에 비판적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특히 한국 기업들의 세계적 팽창이 본격화된 최근에 들어- 역사 속의 자국에 대해서는 ‘제국’이라는 말을 쓰기를 즐기고, 또 그 말을 사용할 때 이렇다 할 만한 비판적 의식을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약 5년 전에 한국방송이 15~25%의 시청률을 줄곧 유지한 이라는 대하드라마를 내보냈다. 이 드라마가 다룬 고려 초기는 과연 ‘제국’이었던가?

길림성 일대, 부여 왕국도 존재

한때 수도를 황도(皇都)라 부르고 독자적 연호 사용을 시도한 점에서는 그러한 면모도 있었지만 태조 왕건과 그 후계자들이 후당, 후주 등 중국의 여러 왕조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는 등 전통적 조공 외교를 계속 펼쳤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11세기 고려의 경우에는 요나라에 조공해 책봉을 받는 한편, 탐라국이나 여진족에게 스스로 조공을 요구하는 등 일종의 소제국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위계질서에서 고려는 요나라나 그 뒤의 금나라, 원나라와 같은 ‘정상’의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해도 주변 약자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등 ‘중간 강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꼭 뿌듯함을 느껴야 하는가? 탐라국과 여진이 ‘고려제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자랑스럽다면, 한반도의 삼국이 일찍부터 중국의 여러 왕조에 조공을 해왔다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중화 민족주의자들에게 뭐라고 문책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제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려보다 고구려일 터이다. 지도상 이미지의 힘이라고나 할까? 국수주의적인 대중적 저서에서 동북 지방 (만주)이나 내몽골은 물론 아예 남쪽 시베리아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는 듯한 ‘대고구려’의 모습을 접하기만 하면 절로 “아, 역시 고구려는 대단했구나!”라는 감탄이 나오게 돼 있다. 국수주의자들의 글이야 그렇다 쳐도,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쓴 (한국역사연구회 엮음·1992)에서도 “서쪽으로 요하까지, 북쪽으로 송화강까지, 동쪽으로 두만강 하류까지”의 전성기(광개토왕 시기·391~413) 고구려의 영토 팽창을 크게 강조한다. 물론 이 시기의 고구려가 요하까지의 요동 지역이나 오늘날 길림성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한 고대 국가가 특정 지역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이 지역을 그 국가의 ‘영토’로 인식해도 좋은가? 둘째, 과연 전성기 고구려의 패권 판도가 그 뒤에도 계속 변화가 없었던가?

예컨대 오늘날 길림성을 중심에 놓고 첫째 물음에 답해보자. 묘지명으로 널리 알려진 광개토왕 시대의 중앙귀족(대사자급) 모두루(牟頭婁)가 북부여, 즉 길림성 일대에서 수사(守事·지방관)를 지냈는데, 이는 바로 그 선조인 대형 염모(苒牟)가 346년에 북부여 지역에서 연나라의 군대를 퇴각시켜 이 지역을 고구려를 위해 확보한 점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4세기 중반 이후로 모두루 가문과 같은 고구려 중앙귀족들이 연나라 군대로부터 지켜낸 고구려 왕실의 근거지, 길림성 일대를 관리해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북위의 사서 를 읽어보면, 458년에 ‘부여 왕국’이 북위에 조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부여 왕국이 바로 오늘날 길림성 일대의 북부여에 해당한다는 것은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면 ‘고구려 제국’이 정복한 길림성 지역에 모두루 가문 계통의 고구려 지배자와 함께 고유의 토착 지배자들도 계속 남아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바로 그렇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지도에서 길림성 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색깔이 칠해져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제국이 이 영토를 간접적인 방법으로밖에 다스리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고구려에서 파견된 관료가 공물 수취나 유사시의 부역, 전쟁 동원을 위한 장정의 일시적 징발 등을 관리했겠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외교를 펼칠 장도로 나름의 독자성을 계속 보유하는 독자적 지배 집단도 존재해온 것이다. 고구려 관료들이 이 집단을 매개로 해 공물, 인력 수취를 했으리라 짐작된다. 즉, 고구려의 영토적 영향력이 컸지만 근대 제국들과 달리 주변부 지역에 대해 기껏해야 토착적 지배 집단을 통한 간접지배만을 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말갈의 언어는 다른 계통

둘째 물음과 연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 만주 지역 상황들이 유동적이었던 만큼 이 간접지배마저도 그렇게까지 강고하지 않았고 고정불변하지도 않았다. 5세기 후반 길림성 북부 일대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은 물길(勿吉·말갈의 일종)이었는데, 이들이 송화강 하류 지역, 즉 북부여의 원래 영토를 장악하게 됐다. 494년에 북부여의 왕실이 종주국 고구려로 이거하고, 북부여 일대를 장악한 물길들이 고구려의 북부 지역을 침략했다. 나중에 속말(粟末) 말갈로 알려진 이 지역의 새로운 거주민들을 고구려가 다시 복속시킨 것은 6세기 말쯤이었는데, 역시 직접지배라기보다는 몇 개의 성곽과 같은 거점에 의한 간접지배 형태였다. 또, 모든 속말 말갈 집단들이 고구려에 복종한 것도 아니다. 고구려에 복속되느니 차라리 북부여 지역을 떠나 수나라가 지배했던 요서 지역으로 이주해, 나중에 수나라의 대고구려 전쟁에 앞장섰던 돌지계(突地稽) 추장의 부족과 같은 ‘친중국 반고구려’ 말갈 집단들도 존재했다. 즉, “고구려가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방대한 주변부 지역의 경우에는 이 다스림이 ‘중앙집권적 영토 지배’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국’이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미는 독자적인 어문 문화 권역이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명실상부한 제국을 이루었기에 그 주변에서 한자문화권이 형성되고, 미국 제국이 남한과 일본 등을 그 영향권 안으로 흡수했기에 우리가 지금도 라틴문자를 ‘영문자’라고 부르고 영어 저서들을 ‘원서’라고 칭하고 원서 내용을 ‘원어 강의’, 즉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교수들을 극진히 우대하지 않은가? 과연 고구려도 이런 ‘문화 제국주의’를 펼칠 수 있었던가? 언어부터 이야기하자면 고구려에 가장 오랫동안 복속돼온 옥저, 동예의 언어는 부여계의 고구려 언어와 원래부터 동질적인데다 고구려 언어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말갈 등과 같이 숙신 계통의 언어를 가졌던 부족들은 아무리 고구려의 간접지배를 받았다 해도 부여계와 계통적으로 다른 언어를 계속 가졌으며 고구려로부터 이렇다 할 만한 어문적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광개토왕 시기를 전후로 해 고구려에 한 세기 넘게 조공을 해온 신라는, 종주국 고구려가 4세기 후반에 이미 한문을 활발히 사용했음에도 5세기 중·후반까지 금석문을 별로 남기지 않는 등 한문을 상대적으로 도외시했다. 즉, 고구려의 정치·외교적 패권은 꼭 신라에 대한 어문적 영향까지는 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6세기 초반의 신라 금석문들이 대체로 신라어의 어순을 따르고 신라어 조사를 한자로 차음 표기하는 등 초기 이두로서의 특징을 보이지만 광개토왕비문에서와 같은 고구려 문장들은 비록 중국 고전 고사의 인용 빈도가 낮고 다소 투박하고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문법의 한문이었다. 에서 6세기 말에 고구려가 보낸 국서를 왜왕권의 전문가들이 며칠간 계속 판독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비록 전설적 형태의 이야기지만, 왜인들에게 그때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어문 문화가 상대적으로 이질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즉, 광개토왕 시기를 전후한 고구려가 정치·군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강자가 됐지만, 어문 문화 차원의 영향력은 꼭 정치적 영향력에 정비례할 리가 만무했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예외적인가

고구려가 독자적인 문화 권역을 형성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배층이 말기가 가까워질수록 중국 고급 문화에 더 많은 친화성을 보였다. 에 의하면 말기의 고구려 지배자들이 중국식의 그릇(변두)이나 상복을 즐겨 사용했으며, 당시 중국 문호인 구양순(歐陽詢·557~641)의 글을 애독했다. 관료로서 구양순이 섬긴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몇 번 침략했다가 결국 멸망시키고 말았지만, 구양순과 같은 고급 문장가들에 대한 고구려인의 존경은 여전했다. 혜자(?~622), 담징(579~631), 보덕(7세기)과 같은 고구려의 고급 승려들이 왜국이나 백제에 가서 불교 교리와 함께 회화 등을 전파했지만 고구려를 포함한 요동 지역 출신의 수많은 젊은 지식인들은 수나라에 유학해 거기에서 오랫동안 체류하고 때때로 귀환을 포기하고 영주하기도 했다(). 즉, 고구려의 대외 문화 교류는 왜국과 같은 ‘머나먼 변방’에 대한 ‘교화’도 포함했지만 중국 고급 문화의 수입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독자적 문화 권역을 가진 제국이었다기보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 문화 공간의 독자성이 강한 하나의 구성원이었다.

제국으로서 고구려를 논할 때 보통 고구려인들의 천하관(天下觀)을 논거로 삼는다. 예외적인 몇 개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대왕들은 ‘황제’를 칭하지 않았지만 광개토왕비문과 같은 문서에서 ‘하늘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로서 무한한 긍지를 나타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북부여나 신라, 백제 등을 조공을 바쳐야 하는 속국처럼 취급했다. 중원고구려비에서라면 전성기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하늘의 도리를 같이 지켜나가는 형과 아우”의 관계, 즉 위계적 관계로 정리된다. 물론 장수왕의 즉위(413) 이후부터 고구려는 형식적으로 중국의 남쪽(송나라)이나 북쪽(위나라)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긴 하지만 이 관계는 형식에 불과한 반면, 북부여나 신라에 대해서 전성기의 고구려는 상당한 지배력과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분명히 동북아의 일부분을 호령하면서 상당히 강한 정치적 주체의식을 갖게 된 소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변부 ‘야인’에 대한 우월한 태도나, 강력한 자기 중심적 주체의식은 과연 그 시대에 고구려에서만 발견되는가? 비록 고구려에 비해 실제 국력이 훨씬 약했지만 왜국의 왕 무(武)가 478년 남쪽 중국 송나라에 국서를 보냈을 때 “털보들이 사는 동쪽 55개 나라를 정벌하고 서쪽 오랑캐 66개 나라를 복속시키고 바다를 건너 95개 나라를 또 평정했다”고 길게 자랑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 ‘정벌’이나 ‘복속’ ‘평정’들은 아이누의 조상이 살았던 혼슈 섬 북부에 대한 약탈과 간접지배 확립의 시도, 그리고 백제의 요청에 따른 한반도에의 병력 파견에 불과했겠지만 소제국적 자세는 크게 봐서는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와 달리 왜국은 중국 세력이 쉽게 미치지 못하는 섬에 있었기에 수나라의 국서에서 자신의 군주를 ‘천자’(天子)라고 높여 부르는 등 자기 중심적 의식을 드러내기가 더 수월했다. 그렇다면 당시 맥락에서 고구려의 자기 중심적 천하관은 과연 그렇게 특출했던가?

고구려의 힘 대신 문화를 흠모하라

고구려가 4세기 말~7세기 중반의 동북아에서 독자적인 정치·군사적 영향권을 형성한 것도, 이를 바탕으로 해서 대국에 걸맞은 강력한 자아의식을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발전 궤도가 당시 동북아 지역에서 유일했다고 보기 어렵고, 또 고구려의 지배력이나 문화적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실제로 강력했던 고구려의 ‘힘’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면서 흠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덕의 이해나 담징의 화풍에서 반영된 고구려 문화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서로 치고 싸우고 지배하고 지배받았던 역사는 다 흘러내리고 없어지지만 고구려인들이 애독했던 구양순의 문장이나 왜국의 성덕태자(?∼622)를 감복시킨 혜자의 불교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불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 문헌

1. 박용운, 상·하권, 일지사, 1985.
2. 한일관계사학회 엮음, 경인문화사, 2005.
3.‘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 여호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7.
4. “Control or Conquer? Kogury?’s relations with States and Peoples in Manchuria” Mark Byington, 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Vol. 4-1, 2007, pp. 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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