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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애씨의 힘

등록 2007-11-22 15:00 수정 2020-05-02 19:25

등 케이블TV에서 ‘시즌제 드라마’의 가능성 보여주는 작품들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대한민국 99%의 사람들에게 이영애는 한국 최고의 미녀다. 하지만 tvN 를 보는 1%의 시청자에게 이영애(김현숙)는 ‘이영애’의 반대말이다. 케이블 방송의 영애씨(김현숙)는 못생기고, 뚱뚱하고, 슬프게도 서른을 넘겼다. 출근해서 야동 보고 퇴근해서 러시아 여자들 있는 룸살롱에 가는 사장(윤형관)은 그를 ‘덩어리’라 부르고, 직장 문을 나서면 주변에는 “급하다고 아무 거나 먹을 수는 없다”며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맞선남이나, 버스의 성추행범뿐이다. 남자들은 서현(윤서현)처럼 돈 한 푼 없어도 “서른 살 이상은 여자가 아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지만, 여자는 영애처럼 ‘돈 떼먹고 도망친 첫사랑’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 는 친절한 영애씨 같은 여배우들이 출연하던 공중파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막돼먹게 뒤집었다.

마니아층 시청률만 확보해도 괜찮아

잘생기고 매너 좋은 연하의 신입사원 원준(최원준)과 영애의 기적 같은 연애는 역시 한 달을 못 가고 깨진다. 그리고 한국방송 의 스타일을 차용한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은 몸매 좋은 영채(정다혜)와 영애의 벗은 몸을 똑같이 건조하게 보여주고, “몸이 부실한” 남편 때문에 투덜거리는 영애 엄마(김정아)를 통해 중년의 성까지 직접적으로 다룬다. 는 명품으로 온몸을 두르는 의 캐리와 그의 친구들이나 미디어에서 선호하는 ‘골드미스’가 결코 될 수 없는 한국의 평범한 직장여성을 위해 리얼리즘으로 구현한 한국판 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보낸 ‘1% 시청자’의 지지는 케이블 방송 드라마의 생존법이자,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의 모범답안이다. 여성의 사랑이 아닌 여성의 ‘인생’과 ‘리얼’은 시청률 30%를 노리는 공중파에서는 쉽게 다뤄지지 않지만, 3%면 차고 넘치는 케이블 방송에서는 마니아 시청자를 상대로 1%의 시청률을 노리면 됐다. 또 대부분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로 구성된 캐스팅은 시즌1의 성공 뒤 다음 시즌 제작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중파 드라마는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고, 톱스타를 캐스팅한다. 그래서 실험적인 소재는 나오기 어렵거나 대중적인 실패를 맛보거나, 설사 성공한다 해도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 문제로 다음 시즌 제작이 어려워진다. 시즌 제작 논의가 나온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결국 사라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1%지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케이블 방송 드라마는 무엇이든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고, 처럼 인기를 모으면 이를 기반으로 더 나은 환경에서 다음 시즌을 제작할 수 있다. 조선조 개화기의 각종 살인 사건들을 과학수사로 풀어내는 수사관들의 활약상을 그린 MBC 드라마넷 은 문화방송에서 방영될 당시 시청률 사각지대인 토요일 오후 편성과 생소한 소재 등으로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해 조기 종영해야 했다. 그러나 케이블 방송에서 은 3%의 ‘대박’ 시청률을 기록해 MBC 드라마넷에서 얼마 전 8시간에 걸쳐 전회 방영을 하는 효자 상품이 됐다.

‘화끈한 눈요기’보다는 새 스토리를

물론 지금 나 의 인기가 공중파 인기 드라마를 능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케이블 방송에서 작지만 새롭게 시작해 서서히 지지를 받는 이들의 방식은 공중파 드라마보다 훨씬 뛰어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두 작품이 더 높은 인기를 누린다면 미래에는 두 작품이 공중파 방송사로 옮겨 방영될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대다수 시즌제 드라마들이 인기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시작해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시즌을 연장하며 배우와 작가 모두가 발전해간다. 공중파 드라마가 마치 구호처럼 해야 한다고 외치기만 했던 시즌제 드라마를, 케이블 방송 드라마들이 지금 자신의 매체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한국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중인 것이다.

다만 문제는 시즌제에 적합한 형태를 띤 이 드라마들이 어떻게 시즌2, 혹은 그 이상의 시즌을 끌고 나갈 해답을 찾느냐는 것이다. 채널 CGV , OCN 등은 짧은 에피소드 위주의 전개와 공중파에서 다룰 수 없는 성적 묘사 등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성의 노출을 강조해 공중파에서는 아직 볼 수 없는 ‘화끈한 눈요기’로만 승부한 이들 드라마는 오랫동안 시즌제 드라마를 끌고 갈 만큼 탄탄한 스토리를 갖지 못했다. 계속 여성들의 노출만 보여주고 끝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점에서 가 매우 능숙하게 ‘시즌2 드라마’를 이끌어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는 시즌2에서 직장인의 치사하고 비열한 모습은 모두 모아놓은 듯한 지순(정지순)을 등장시켜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만들고, 시즌1에서 영애 못지않게 인기를 모았던 주변 캐릭터들은 서로 로맨스로 엮여 독자적인 스토리를 갖는다. 시즌1에서 영애를 중심으로 조금씩 그 특징이 소개된 캐릭터들은 시즌2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가 더 많은 스토리를 끌고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시즌1이 주인공 영애가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중심이 됐다면, 시즌2는 영애뿐만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으로 확장됐다.

실험적 1%가 경직된 99% 바꿀 수도

새로운 시즌을 맞아 더 확장된 의 이야기는 남녀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적용된다. 시즌1의 에피소드 중 상당수가 대부분 영애씨와 주변 여성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막돼먹은 남자들에 대한 고발이었던 것과 달리, 시즌2는 여자의 눈으로 본 남자 이야기에 가깝다. 먹고살기 위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사장에게 ‘센스쟁이’와 ‘재치쟁이’를 번갈아 말하며 충성경쟁을 하는 지순과 서현의 모습은 추하기보다는 늘 고달프게 사는 평범한 남성 직장인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는 시즌제 드라마가 지난 시즌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가 시즌2를 넘어 시즌3까지 제작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고, 새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시청자 수를 점점 늘린다는 것, 그것은 크지만 경직된 99%가 할 수 없는 것을 작지만 실험적인 1%가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와 은 지금 한국 드라마 산업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단순히 ‘미드 따라하기’로서가 아닌, 자생적인 필요에 의해 제작 시스템에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1%’지만, 그들이 ‘99%’를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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